국정원, 수백 건 이첩했지만 경찰, 검찰에 한 건도 안 넘겨 과장급 중 ‘안보’ 수사 경력, 평균 1년 그쳐 국정원-경찰 간 정보 공유 한계도 탈북민 신변보호 인력 등은 줄어 “아랫돌빼서 윗돌 괴기”
뉴스1
“진사장에게 과업을 주어 인맥 관계를 잘 형성하도록 하면서 정치 세력의 내적 동향을 비롯해 가치 있는 자료를 수집하도록…” (9월 2일)
“진사장 지역에서 장악 지도하는 단체들을 역적패당의 퇴진을 위한 촛불행동에 적극 참가시켜…” (11월 3일)
‘창원 간첩단’이라 불려온 자주통일민중전위(자통) 조직원인 성모 씨가 2022년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으로부터 받은 지령문의 내용이라고 당국은 성 씨 등의 공소장에서 밝혔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지난해 성 씨를 비롯한 자통 핵심 조직원 4명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화된 이 문건을 확보했다.
국정원과 경찰이 ‘진 사장’으로 추정해 강제 수사에 나섰던 A 씨에 대한 사건은 올 1월 1일부터 국정원에서 경찰로 넘어갔다. 하지만 A 씨는 당국이 압수수색에 착수한지 1년 3개월 가까이 흐른 지금도 검찰에 송치되지 않았다. 국정원이 ‘자통 하부망’으로 보고 강제 수사에 나섰던 상당수 피의자들 상황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수백 건 넘겨받았지만 간첩 검거 ‘0건’
경찰 안보수사국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로 ‘간첩 수사’를 전담하게 된 올 1월 1일 이후로 이달 20일까지 8개월 가까이 국정원으로부터 이첩받은 수백여 건 사건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이 지난 8개월 동안 국정원으로부터 이첩받은 수백 건과 관련한 피의자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검찰에 넘긴 건수는 한 건도 없었다.
경찰이 올 1월부터 6월 말까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 피의자에 대해 구속영장을 집행한 건수도 한 건도 없었다. 피의자 우편물이나 전기통신에 대해 통신제한조치(감청)를 취한 건수도 3건에 불과했다. 간첩 수사에 정통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통신제한 조치, 구속영장 집행 건수 등을 봤을 때 피의자를 특정한 뒤 증거를 수집하는 단계까지 수사가 무르익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경찰 안보수사국은 올 1월부터 6월 말까지 국가보안법위반 찬양고무, 회합통신, 탈출예비 혐의 등으로 총 14명을 검거해 불구속수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중 8명의 피의자는 북한 김일성 일가 등을 숭배하는 표현물을 유포하거나 소지한 혐의(국가보안법위반 찬양고무)를 받았고, 4명은 다양한 이유로 북한 공작원과 온·오프라인으로 교신한 혐의(회합통신)를 받았다. 북한에 몰래 재입북하려 한 혐의(탈출예비)로 적발된 탈북민 피의자는 2명 검거됐다.
경찰은 2020년 12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하도록 법이 개정된 이후 유예 기간인 3년 동안 국정원과 합동수사를 하면서 2021년 10명, 2022년 4명, 2023명 3명을 국가보안법위반 목적수행 혐의로 검거했다. 전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는 문재인 정부 시절이었던 2021년 27명,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인 2022년 30명, 2023년 48명을 검거했다.
하지만 경찰이 올 1월부터 단독 수사한 이후론 올해 이미 3분의 2 시점이 지난 현재까지 간첩 검거가 한 건도 없다는 것.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간첩 피의자를 검거하려면 장기간 내사가 필요한 만큼 1년에 한 명도 검거하지 못하는 경우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면서도 “다만 경찰이 이미 3년의 유예기간을 가진 데다 이첩받은 사건들만 수백여 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제대로 수사가 되는 지 의문이 들긴 한다”고 했다.
● “안보수사 경력 긴 ‘베테랑 경찰관’ 부재”
3년의 유예기간까지 거친 경찰의 ‘간첩수사’ 실적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선 경찰 내부에서도 간첩 수사를 경험한 ‘베테랑 경찰관’이 적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전국 간첩 수사를 지휘하는 컨트롤타워인 경찰청 안보수사국 과장과 대장의 수사 경력은 평균 11년에서 20년 수준이었지만, ‘안보’ 수사 경력은 과장급과 대장급이 각각 평균 1년과 1년 6개월에 그쳤다. 경찰청 안보수사국 계장급 이상과 각 시도경찰청의 안보수사대 과장, 대장 등 전국의 간부급 안보경찰 108명 중 안보수사 경과가 있는 사람은 29%인 32명에 불과했다.
경찰 관계자는 “전대협이나 한총련, 범민련에 대해 전혀 모르는 직원들이 안보수사국에 전입하고 있다”며 “수사 성과보다는 조직개편이나 교육, 회의에 더 신경을 쓰고 있어 현시점에서 경찰 단독으론 ‘직파 간첩’ 등 큰 사건은 절대 못한다”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안보수사국장 등 간부는 거의 1년 주기로 교체되고 있다”며 “대부분 직접 안보수사를 해보지 않은 경우”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몸으로 수사를 해보지 않아 이론적으로 수사를 하는 것 같다”며 “보고서 작성을 비롯한 홍보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간첩 수사를 진행할 순수 수사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경찰 안팎에서 나온다. 경찰 안보수사국에서 실질 수사를 담당하는 안보수사 1·2과와 안보사이버수사, 방첩경제안보수사계의 인력은 총 168명이다. 전국 시도경찰청과 일선 경찰서에 있는 전체 안보경찰은 2310명이지만 이중 시도경찰청 안보수사대와 일선 경찰서 인력 상당수는 탈북민 신변보호, 공항만 파견 등 수사와 무관한 업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첩 수사는 정보의 ‘출처 보안’이 핵심인데 국정원과 경찰의 정보 공유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보수사 경험이 많은 한 관계자는 “한 기관에서 사건을 처리한다면 수사 담당과 정보 수집 담당이 정보 출처를 어떻게 보호할지 강구할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첩보를 수집하는 국정원이 정보를 섣불리 경찰에 넘겼다가 공들여 쌓아온 휴민트 자체가 망가지는 것을 우려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일각에선 국정원과 경찰이 지난해 합동으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수사한 이후 이미 간첩단 하부조직으로 의심받는 관련자들이 수사에 필요한 증거를 인멸해 경찰로선 당장 수사하기 쉽지 않은 여건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안보수사국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지난 몇년 간 대대적인 간첩단 수사가 진행되면서 ‘하부조직’을 비롯한 여러 관련자들이 활동을 하지 않고 숨어있을 수 있다”고 했다.
● “아랫돌빼서 윗돌 괴기” 일선서도 ‘인력난’
경찰이 올초 경찰청 안보수사국 등을 확대하는 대신 일선 경찰서 안보과 인력을 대폭 축소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면서 ‘탈북민 신변보호’ 업무 등을 맡은 일선 경찰서의 인력난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 내부에서는 “경찰의 자산인 ‘최일선 안보 감시망 촉수’를 없애버린 것”이란 비판까지 제기된다.
경찰은 올 1월 조직 개편 이후로 전국 41곳 경찰서에 설치돼 있던 안보과 중 9곳만을 남겨둔 상태다. 남아있는 일선 경찰서의 안보과도 적게는 3~4명 인원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권의 한 경찰서 안보과는 올초 조직개편 이후로 기존 8~9명 인원에서 3명으로 정원이 줄었다. 팀장급을 포함한 3명이 관내 탈북민 신변보호 업무와 113 안보상황 신고 사건, 안보 취약요소 관리 등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명이 각 30~40명 씩 나눠 관내 탈북민 신변 보호를 맡고, 북한이 날려보낸 오물풍선이 관내에 떨어질 때면 3명이 교대로 출동하는 식이었다.
일선 경찰서의 한 경찰관은 “올해부터 외사계가 폐지돼 일선서 안보과 가운데 외빈, 테러첩보 업무까지 떠안은 곳도 있다”며 “안보과 인원은 턱없이 적어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정도”라고 전했다. 또다른 일선 경찰서 안보과 경찰관도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괸 상황”이라며 “팀원 3명이서 ‘당직휴무’ ‘연병가 휴무’ 등이 겹치면 1명이 근무하는 일도 생긴다”고 했다.
전국 탈북민 신변보호 담당 안보 경찰 인력은 올해 737명으로 2015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안보 경찰 한명 당 신변보호를 맡고 있는 탈북민 숫자도 2024년 6월 32.35명으로 전년 대비 12% 이상 늘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단기적으로는 대공 수사 경력이 10년차 이상인 베테랑 수사관 위주로 특별팀을 꾸리는 등 대공수사팀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경찰청 산하 안보수사국이 아닌 별도의 국가안보수사본부를 신설해 간첩 수사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보 소식통은 “간첩 수사는 당장 실적이 없더라도 1, 2년 꾸준히 파고들 의지와 끈기가 중요한데, 이런 동기 부여가 잘 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은희 의원은 “간첩 수사 공백에 대한 불안이 지속되고 있다.”며 “국정원과 협조 체계를 긴밀히 구축해 국가안보 위험을 최소화하는 대공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