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중앙은행이었던 조선은행 1912년 준공 후 내부 관람 행사도… 현재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현 신세계 본점인 미쓰코시백화점 1930년 등장하자 “도회의 불야성”… “아스팔트 위 지게꾼 설움” 비판도
《상업 중심지 된 한은 앞 교차로
동아일보 1939년 5월 7일 기사는 경성 시내의 한 공사 소식을 전한다. “조은(朝銀) 앞 로터리 경성의 이채로 등장, 조선은행 앞 로터리는 금년 봄 접어들며 공사를 재촉하더니 요즘은 공사는 필하고 잔디 입히고 식목하는 등 채색에 바쁘다. 이제 한가운데 분수를 만들면 조선은행 앞에는 대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나타낼 것이다.” 지금도 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는 한국은행 앞 교차로를 가리킨다. 1930년대 후반 이곳 교통량이 계속 증가하자 경성부가 회전 교차로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로터리는 단지 교통시설만이 아니었다. 잔디와 나무를 심고 분수대까지 만들어, 사진엽서의 설명처럼 “이조 오백년의 전통보다도 오늘날의 경성은 젊은 근대성이 박동치는 왕성하고 명쾌한 도시문화”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식민지 중앙은행의 권위를 한껏 표현하기 위해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철골 혼합구조로 설계했다는 조선은행은 1912년 1월 준공했다. 이에 맞추어 민간 유력자들을 초청하여 내부를 관람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의 제일, 30만 원의 대건축물, 조선의 과요(誇耀·자랑할 만한 것)”라고 표현된 경성우편국은 조선물산공진회 개막에 정확하게 맞추어 1915년 10월 1일 낙성식을 열었다. 내부에 ‘우편, 전신, 전화의 개요’ 전시 공간을 마련하여 대중의 관람을 허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편이나 전신은 일제가 도입한 대표적인 ‘근대 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성우편국은 이를 선전하는 무대로서 건물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조선은행, 경성우편국 등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조선은행 앞 광장, 일명 ‘선은전(鮮銀前)’은 점차 시내의 다른 광장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곳은 경성의 ‘현관’인 남대문역, 숭례문에서 시내 중심부로 이동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면서, 경성우편국 옆은 일본인 중심지의 상징 격인 본정통의 입구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일제는 선은전 관리에 힘을 쏟았다. “교통 방해를 명목으로 조선은행 앞에 지게꾼이 모이지 못하도록 순사 한 명이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노동자 백여 명을 내쫓”는가 하면(‘동아일보’ 1920. 5. 24.), 1924년 “이미 좌우 양편에 화려한 전등이 장치되어 밤에도 낮같이 밝아 경성의 문 어구로서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였다(‘동아일보’ 1924. 4. 19.). 더불어 도로는 콜타르로 포장했는데, 이런 여러 가지 정비는 “모두 이 일대에 시험적으로 먼저 시행된 일”이었다(‘동아일보’ 1924. 9. 29.). 선은전은 일제가 건설한 도시 문명을 “시험적으로 먼저” 보여 주는 공간이었던 셈이다.
일제는 식민지 중앙은행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르네상스 양식의 조선은행을 1912년 준공했다. 1920년경 선은전(조선은행 앞) 광장(위 사진). 왼쪽이 조선은행, 오른쪽이 경성우편국이다. 1930년대 후반 선은전 광장의 교통량이 늘자 회전교차로를 만들고 분수대도 설치해 화려한 도시문화의 공간으로 바꾸고자 했다. 1940년대 초 분수대가 설치된 선은전의 로터리 모습(아래 사진). 일제강점기 사진엽서에 담겨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30년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로 조선은행 앞 광장에 신축된 미쓰코시백화점.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바뀌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런데 점점 화려해지는 선은전 풍경을 달리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1934년 연말 거리를 취재한 기자는 “거리의 룸펜이 느끼는 바 세말의 풍경은 어떤가 보려고 길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게꾼의 설음, 구루마꾼의 슬픔, 걸인군, 가로세로 아스팔트 우로 고저청탁을 한골로 쏟은 것 같이 교통음향에 어울려 정신을 몰아간다. 조선은행 앞에서 남으로 바라보고 좌우로 기웃거리며 서울 심장의 푸로필을 비뚜로 보려 했다”(‘동아일보’ 1934. 12. 8.)라고 썼다. 카프(KAPF) 계열 소설가 김남천은 “이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실로 돈양이나 먹인 것들인 모양인데 서로 상의하고 짓지 못한 것이어서 그런지 조화라곤 맞을 수 없게 되었다. 저축은행은 금고나 수전노의 느낌을 주어 우리 상하기 쉬운 청년들의 마음을 우울에 잠기게 하고 다소 싱겁고 싯붉은 우편국은 봄바람에 상기한 주정꾼 같아서 심히 더웁다. 광고등은 역전으로 옮겼으면 좋겠고 때묻은 백동전 같은 조선은행도 좀 더 보기 좋게 지을 수 있었을 걸 하고 가끔 건축가를 나무란다”고 쓰기도 했다(김남천, ‘長安今古奇觀’, ‘조선일보’ 1938. 5. 10.). 경성의 자본주의 도시 문명을 상징하는 무대, 선은전의 화려함이 도를 더할수록 그 그늘도 짙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