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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유재동]먹사니즘의 본질은 막쓰니즘

입력 | 2024-08-21 23:15:00

유재동 경제부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평소 자신이 포퓰리스트라는 비난에 전혀 굴하지 않는다. 그냥 쿨하게 인정하고 때로는 이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그는 언론 등에 “포퓰리즘으로 비난받은 정책을 내가 많이 성공시켰다. 앞으로도 포퓰리즘을 하겠다”고 했다. 포퓰리즘을 대놓고 하겠다는 자에게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은 아무런 타격감이 없다. 임기응변과 권모술수의 달인다운 면모다.

포퓰리즘이란 말이 본인도 듣기는 거북했는지 이 대표는 이번엔 먹사니즘이란 대안을 들고나왔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즉 민생을 최우선에 두겠다는데 그 대의(大義)에 누가 반기를 들까 싶다. 문제는 그 아름다운 단어를 한 꺼풀 벗겨냈을 때 드러나는 진짜 속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던 포퓰리즘 정책들은 죄다 ‘민생’, ‘실용’ 같은 그럴듯한 말들로 포장돼 있었다. 이재명의 새 정치 구호도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철학도 원칙도 없는 ‘나랏돈 퍼주기’


이 대표가 외치는 민생회복지원금은 먹사니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례다. 그의 주장대로 전 국민에게 25만 원씩 나눠주기 위해선 생때같은 나랏돈 13조 원이 필요하다. 국민 개개인이 받는 돈은 그야말로 ‘용돈’ 수준이지만 이를 위해 들어가는 재정은 천문학적이고 오히려 고물가를 더 부추기는 부작용까지 우려된다. 이 대표가 ‘1호 민생법안’으로 밀어붙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남아도는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자는 것인데 쌀 과잉생산을 유발할 수 있는 데다 매입·보관 비용도 매년 1조 원이 들어간다. 대선 공약이었던 ‘탈모약 건보 적용’과 ‘병사 월급 200만 원’, 또 그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기본 시리즈’도 모두 국가 재정에 심각한 충격을 주는 내용이다.

굳이 나랏돈을 펑펑 써야 한다면 곳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에 대한 구상이라도 내놔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대기업-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나 하면 정책의 타당성 여하를 떠나 앞뒤 논리라도 맞을 텐데, 여태 ‘부자 감세’ 프레임을 씌어 반대해 온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느닷없이 추진하겠다고 한다. 기존 입장이 어떻든지 간에 납세자의 표만 얻을 수 있다면 나라살림 축내는 건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지금까지 지켜본 이재명의 먹사니즘은 무슨 철학이나 원칙이 있는 국정이념이라기보다는, 뭐든 나눠주거나 깎아주면서 민생을 챙기는 정치인으로 자신을 각인시키고, 무리한 지출에 국고가 바닥나는 현실은 외면하는 무책임한 정치쇼에 가깝다.


민생 가장한 또 다른 포퓰리즘일 뿐


진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그리고 요즘 이 대표가 유독 강조하는 ‘성장’의 해법을 찾으려면 지금처럼 재정 퍼주기 같은 원시적인 처방에 기대선 안 된다. 그보다는 투자와 혁신 등 민간 부문의 창의성이 빛을 발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취약 계층에 기회의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국가 지도자급 반열에 오르는 걸 목표로 한다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나라의 시스템을 바로잡는 일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가령 연금·노동개혁과 전기요금 현실화 같은 문제는 비록 유권자의 인기를 얻진 못하더라도 국가 장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제들이다.

지금 서민경제 현장은 현금 뿌리기로는 해결 못 하는 일들만 산더미다. 당장 노동시장에선 이렇다 할 직업도, 구직의사도 없이 그냥 쉬는 청년이 사상 최대라고 한다. 먹사니즘을 표방한다는 이 대표는 이들의 지갑에 25만 원씩 꽂아준다는 것 외에 청년 ‘일자리 절벽’의 근본 해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나. 민생이라는 말의 무게를 그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닌지 걱정이다.




유재동 경제부장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