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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선량한 약자’ 탈 쓴 악의 얼굴… 스릴러 거장의 귀환

입력 | 2024-08-24 01:40:00

노부부가 벌이는 연쇄 납치 사건… 美 정치 이슈 등 현실 담아 흥미
올해 데뷔 50주년 맞은 스티븐 킹… 작가로서의 삶 담은 해설집도 관심
◇홀리/스티븐 킹 지음·이은선 옮김/596쪽·2만1000원·황금가지
◇스티븐 킹 마스터 클래스/베브 빈센트 지음·강경아 옮김/248쪽·3만3000원·황금가지





“내 휠체어를 좀 밀어줄 수 있겠소?”

인적 드문 놀이터 앞 주차장에 밴 한 대가 서 있다. 뒷문을 열고 아스팔트 위에 휠체어 진입판을 연결한 채 80대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 옆엔 그의 부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휠체어 배터리가 나가 수십 분째 진입판을 못 올라가고 있단다.

누군들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을까. 동네에서 조깅을 하던 젊은 남성이 기꺼이 나선다.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진입판 꼭대기에 다다를 무렵 난데없이 청년의 뒷덜미에 주삿바늘이 꽂힌다. 눈앞이 흐려지고 팔에서 기운이 빠진다. 순간 휠체어에서 뛰어내려 남자를 내려다보는 노인.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1974년 데뷔작 ‘캐리’를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 왕성하게 작품을 써온 미국 추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 사진 출처 스티븐 킹 홈페이지

반세기 동안 거의 매년 신작을 발표해 온 미국 추리소설 거장 스티븐 킹의 ‘홀리’가 16일 국내 번역 출간됐다. 1974년 데뷔작 ‘캐리’를 시작으로 ‘샤이닝’, ‘미저리’, ‘쇼생크 탈출’, ‘돌로레스 클레이본’ 등을 쓴 그는 미국 작가 중 가장 많은 작품이 영상화될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영화로 만들어진 스티븐 킹의 소설들. 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그것’, ‘그것: 두 번째 이야기’, ‘샤이닝’, ‘닥터 슬립’,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캐리’, ‘미저리’. 사진 출처 워너브러더스 홈페이지 

작품마다 인상적인 악당 캐릭터를 만든 저자는 신간에선 누구든 도움의 손길을 건넬 만큼 연약해 보이는 80대 교수 부부를 내세웠다. 이들은 납치한 이들을 저택 지하실에 가두고 부패한 생간을 먹이는 엽기적인 고문을 벌인다. 의문의 연쇄 실종사건 해결에 탐정 홀리 기브니가 뛰어든다. 중년 여성이 한 달 넘게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고 의뢰한 것. 홀리는 비슷한 실종자가 더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들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다. 선량한 약자의 얼굴로 희생양을 끌어들이는 노부부 악당을 추적하는 홀리의 이야기가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된다.

미국 언론으로부터 “스티븐 킹의 소설 중 가장 정치적”이라는 평을 받은 신간에는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 미 의사당 공격 등 최근 미국 사회를 흔든 첨예한 이슈들이 소재로 다뤄진다. 예컨대 작품 속 노부부는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동성애 혐오주의자다. 2021년의 코로나19 팬데믹이 배경으로 설정돼 백신 접종과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다 죽음을 맞는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나온다. ‘2024년에도 트럼프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라는 홀리의 독백이 의미심장하다. 각자의 집에서 온라인으로 조의를 표하는 조문객 등 팬데믹으로 달라진 미국 사회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고 재미있다.

스티븐 킹 팬이라면 올해 그의 데뷔 50주년을 맞아 함께 출간된 ‘스티븐 킹 마스터 클래스’(황금가지)도 읽어볼 만하다. 생활고로 세탁일 등을 하며 글을 쓰던 킹이 쓰레기통에 버린 데뷔작 ‘캐리’ 원고를 아내가 출판사에 보내 스타 작가가 된 과정 등이 담겼다. 무엇보다 대중적 장르소설에 대한 문단의 편견에 맞선 킹의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졌다. 미국 국립도서재단이 킹에게 공로상 메달을 수여하자, 저명 문학평론가로 미국 예일대 교수였던 해럴드 블룸은 “스티븐 킹은 문장 단위, 문단 단위, 책 단위 모든 측면에서 심히 미숙한 작가”라고 비난했다. 이에 언론을 통해 밝힌 킹의 응수는 역시 그답다.

“블룸이 진실을 자백할 수 있도록 정맥마취제를 주사한 뒤 ‘자, 해럴드. 실제로 스티븐 킹의 작품을 몇 개나 읽어보셨소?’라고 묻고 싶어요. 그러면 아마 채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대답이 나올 거로 생각합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