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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와서 낙하산만 200번 넘게 타”…탈북민 최초 특전사된 김대현씨 [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입력 | 2024-08-25 08:00:00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있는 김대현 씨. 그에게 하늘은 뗄 수 없는 인생이 됐다.

“북한에서 온 탈북민인데요, 군 면제를 해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군대에 꼭 가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 김대현(가명)은 구글에서 찾아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이같이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건 우리 관할이 아닌데….”

그가 전화를 건 곳은 병무청이었다. 병무청 담당자는 “국방부로 전화하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김 씨는 다시 구글을 통해 찾아낸 전화번호로 국방부를 찾았다. 그런 식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과정에서, 김 씨는 탈북민도 군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군에 갈 수만 있다면 이왕이면 멋진 곳에 가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구글을 뒤적이던 그의 눈에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가 눈에 띄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 씨는 특전사라는 부대가 존재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김 씨의 군 입대 결심에는 탈북청소년들이 다니는 한겨레중고등학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가 영향을 미쳤다. 설문 가운데 ‘북한이탈주민도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항목이었다.

김 씨는 “무조건 가야 한다”를 찍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질문엔 “대한민국 정부에서 우리를 위한 마음으로 면제를 해주긴 하지만, 군에 가고 싶어도 못 가게 하는 것이야 말로 차별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려면 국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적었다.

답을 쓰면서 김 씨는 반드시 군대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학교 선생님들도 “너는 군인이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응원해주었다.

특전사를 목표로 김 씨는 군 입대 준비를 시작했다. 2015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전문대 군사학과를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솔직히 그때는 특전사는 관련 학과를 졸업해야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한 학기를 다니고 나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바로 특전사에 진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년 동안 군사 기본지식을 배운 그는 특전사 시험에 응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이었다. 주변의 탈북민들은 “국방부에서 형식적으로는 된다고 말했겠지만, 실제로는 탈북민이 특수부대에 들어가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위로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런 게 아니고 제가 시험을 못 쳐서 그런 겁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특전사 시험은 1년에 다섯 번 치러진다. 나름대로 준비해 두 번째 시험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낙방의 쓴 맛을 봤다.

두 번째 떨어졌을 때는 실망스러웠다. “정말 대한민국 사회가 아직도 탈북민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일까”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는 심정으로 세번 째 시험을 치렀다. 이번엔 필기평가를 통과했고, 체력평가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마지막 관문인 면접도 무난하게 치렀다. 결국 그는 최종 합격을 했다.

특전사 복무 시절의 김 씨 모습.



● 특전사 대원의 삶
“다들 눈 감아”

어두운 밤 김 씨는 입대 동기들과 함께 운동장에 앉아 있었다. 지옥 훈련을 받던 날이었다. 힘든 훈련을 끝낸 뒤 눈을 감는다는 건 훈련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에게 조용히 나가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부끄러워 나가기를 꺼리는 훈련병을 배려한 조치다.

김 씨가 처음 입대할 때만 해도 동기는 200명이었다. 그런데 일주일간의 첫 지옥훈련을 끝냈을 때엔 이미 70~80명이 줄어들었다. 그중에는 태권도, 유도 등 육체적인 고통에 익숙했을 운동선수 출신이 많았다.

눈 감는 시간이 계속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친 김 씨도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살포시 뜬 눈에 자기보다 체력적으로 한참 약하다고 생각했던 동기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쟤도 견디는데 내가 왜 못 견뎌.”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때 “우리 아들이 특전사에 갔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시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집에 다시 가면 무슨 망신이람. 오늘은 절대 나가지 않을거야.”

김 씨는 그런 식으로 지옥훈련 기간을 버텨냈다.

그리고 2주 훈련 뒤 낙하교육이 진행됐다. 그는 고소공포증을 몰랐는데, 막상 비행기 문이 열린 뒤 뛰어낼 시간이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다.

“뛸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이 말을 되뇌이던 순간 비행기 문밖으로 몸뚱이가 튕겨져나갔다. 등뒤에 있던 동기들에 떠밀린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생 처음으로 하늘을 날았다.

낙하교육 중에도 하차하는 훈련생이 속출했다. 끝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짐을 싸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역시 훈련기간 4번 차례 공수교육에서 낙하훈련을 받았지만, 뛰어내릴 때마다 무서운 감정에 떨어야만 했다.

2017년 10월 입대한 김 씨는 이듬해 4월 정식으로 임관한다. 6개월 동안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한 환경에서 입학생의 절반이 탈락했지만 김 씨는 끝까지 버텨냈다. 탈북민으로서 직업군인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

그가 처음 받은 보직은 화력주특기. 보안을 중요하게 여기는 군대의 특성상 그의 군 생활을 자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는 빠르게 적응했다. 벌벌 떨어야했던 낙하훈련도 점차 익숙해졌고, 5㎞ 수영훈련도 무사히 통과했다.

최종 고비는 행군이었다. 다른 보직에 비해 화력주특기가 들고 다녀야할 장비의 무게는 훨씬 무겁다.

3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걸어댜 하는 천리행군 자체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군장 40㎏에 각종 무기까지 휴대하고 50㎞ 를 강행군해야 하는 훈련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만약 환자라도 발생하면 그의 짐까지 나누어 메고 가야만 한다. 김 씨는 군 복무기간 중 자신의 짐을 전우에게 넘긴 적이 없다. 그렇게 2022년 8월 김 씨는 4년 6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나왔다.

장기복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군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걸고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이다.

맨 처음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다리가 떨려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특전사 생활을 하면서 거듭 낙하훈련을 받다보니 어느새 하늘을 나는 일이 너무 행복했다.

특전사 시절의 김 씨가 해상침투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 사라진 엄마와의 만남
“하늘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가 탈북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잔디에서 공을 차고 싶어서였습니다. 북한에서 가질 수 있는 꿈의 최고치였죠.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하늘을 날다니, 참 멋있지 않습니까.”

김 씨는 1995년 북한 함경북도의 국경마을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가 사라졌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어릴 적 기억은 없었다. 어머니가 사라진 뒤 그는 8살까지 고모의 손에서 자랐고, 이후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다시 계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고생은 모르고 컸다. 계모가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잘 벌어왔고, 김 씨를 친아들처럼 아껴줬다. 용돈도 넉넉히 받아 썼다.

걱정 없이 살 줄 알았던 김 씨에게 열다섯되던 해에 생각지 못한 일이 생겼다. 학교에서 나오는 그에게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다가온 것이다.

“네가 대현이구나. 난 너 외삼촌이야.”

친엄마와 외가를 까맣게 잊고 살던 그에게 다소 혼란스러운 조우였다. 외삼촌은 용돈을 두둑이 쥐어준 뒤 “집에 나랑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

집에 가서 외삼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끝내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가 어릴 때부터 고모들은 그의 친엄마를 나쁜 사람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다. 누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도 수시로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그가 엄마와 연락이 돼 사라지는 일을 경계한 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외삼촌을 만났다고 하면 집안이 난리가 날 것이 뻔해보였다.

외삼촌은 이후에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런 만남이 몇 차례 이어졌을 때 삼촌이 그에게 넌즈시 물었다.

“엄마 목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지 않니. 엄마는 너를 너무 보고 싶어 해.”

머리를 끄덕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핏줄의 힘이 아니었을까. 기억조차 희미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왜 나를 버리고 갔는지도 알고 싶었다.

“대현이니?”

삼촌이 쥐어준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었다.

“네”

그의 대답에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우는 소리를 들으니 그 역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났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남쪽이 고향인 의용군 출신이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외가는 일찍 연고가 있는 남쪽으로 탈북해 정착했다. 어머니도 어느 날 몰래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떠났다. 남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할 외독자인 대현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이후 남쪽에 정착해 재혼까지 했다. 하지만 북에 두고 온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삼촌을 통해 “우리 대현이가 이젠 내 말을 알아들을 나이가 됐으니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지난달 진행된 남북하나재단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발표하는 김 씨. 그는 이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 “잔디밭에서 공을 차고 싶어”
처음이 어려웠지 이후 어머니와의 통화 횟수는 점점 잦아졌다.

운동을 좋아했던 김 씨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거기 가면 잔디에서 공을 찰 수 있어요?”

TV에서 가끔 틀어주는 외국 축구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파란 잔디 위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김 씨는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그가 사는 환경에선 잔디에서 공을 찬다는 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럼. 여기는 잔디 구장이 너무 많아. 어딜 가든 잔디에서 공을 차지.”

그 말에 어머니가 계신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차마 집을 떠날 생각은 못했다. 아버지와 자신에게 너무 잘해주는 계모를 두고 사라질 순 없었다. 갈등의 시간은 오래 이어졌다.

한국으로 떠날 결심은 다소 충동적으로 정해졌다. 17살 때인 2012년 겨울 그는 운동장에서 눈을 치우고 있었다. 계속 쏟아지는 눈으로, 일주일 내내 계속이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면 파란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하고 있을 것인데, 여기서 욕을 먹어가며 흙바닥 눈이나 치고 있다니.”

순간 짜증이 밀려왔고, 평생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그는 눈삽을 팽개치고 외삼촌에게 달려갔다.

“나 엄마한테 갈래.”

그의 결심이 서자 어머니는 부랴부랴 탈북 브로커를 연결해줬다.

탈북 과정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브로커가 있는 곳까진 기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도중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기차에서 휴대전화에 저장된 한국 음악을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열차 안전원이 조용히 다가와 그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서 들은 것이었다. 한국 음악을 확인한 안전원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를 깨워 조사실로 데려갔다.

휴대전화에 꽃은 SD카드 안에는 한국 음악은 물론 한국 영화도 가득했다. 여기서 잡히면 탈북이 물 건너가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이 고비를 넘어야 했다.

“안전원 동지.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그 손전화는 안전원 동지가 가지십시오.”

무섭게 꾸중하던 안전원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북한에서 휴대전화 가격은 한 가족이 몇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돈이다.

안전원은 조서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넣더니 “네가 어리니 한번만 봐 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봐야 자리도 없으니 조사실에 편히 앉아가라고 자기 자리까지 양보하는 선심을 썼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한 그는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착해 브로커를 만났다. 그런데 일주일이 되도록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브로커는 밤마다 그를 두만강 인근의 외진 산으로 데리고 가서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특전사 시절 전우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 중인 김 씨.



● 메콩강에 뛰어들다
2012년 12월 29일 새벽 3시. 김 씨는 그날도 브로커를 따라 나와 벌벌 떨며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또다시 실패였다.

“추우니 집에 가자”

실망한 브로커는 그렇게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가 중간쯤 갑자기 두만강으로 뛰어 내려갔다.

“중국에 가면 신호가 잡힐거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던 김 씨도 브로커를 따라 열심히 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중국에 위치한 맞은편 산에 올랐다. 브로커의 예상대로 그곳에선 전화가 연결됐다. 마침내 엄마와 통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벽 3시에 아들이 탈북해 중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즉시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 후 김 씨는 산 속에 들어앉아 그를 데려갈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두 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김 씨의 머릿속은 고민으로 가득 찼다. 막상 중국에 오니 집을 몰래 떠나온 일이 후회스럽고, 다시 북으로 건너가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저 안 갈래요. 집에 다시 가야 할 것 같아요”

김 씨가 불쑥 말을 꺼내자 브로커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화를 냈다.

“이젠 되돌릴 수 없어. 너 강을 건너다 경비대에 체포되면 감옥에 가야 해. 엄마랑 전화했다는 것을 알면 가만두겠니.”

맘을 다잡은 김 씨는 결국 차를 타고 연길로 들어온 뒤 브로커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24시간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아, 내가 좋은 곳으로 왔구나.”

시장에 나가 돌아다니는데 한국 영화에서만 보던 억양을 쓰는 부부가 앞을 지나갔다. 그 말을 더 듣고 싶어 한 시간 남짓 이들 부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뒤 연길을 떠났다. 탈북 브로커가 모집한, 중국에서 결혼해 살던 탈북여성들이 일행이었다.

이후 그의 여정한 신기한 경험으로 기억된다. 북한에서 떠날 땐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던 때였지만, 며칠에 한 번씩 계절이 바뀌었다. 마침내 쿤밍에 도착했을 때 계절은 더운 여름이었다. 운동을 즐겼던 그에게 험준한 산을 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라오스 국경에서 메콩강을 건널 때 콩깍지처럼 생긴 배를 타면서 경험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날 일이다.

배를 타자마자 브로커가 겁을 주었다.

“생리 중인 사람 손을 드시오. 이 강에 악어들이 득실득실하는데, 예전에 악어들이 피 냄새를 맡고 쫓아와 여자를 물어간 적도 있어요.”

그의 말에 일행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기우뚱거리는 배에 몸을 맡긴 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그런데 내릴 때 사고가 생겼다. 뒤에 앉은 모녀가 급히 내리려다 배가 뒤집힌 것이다.

순간 김 씨는 달려들 악어떼가 떠올랐다.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물속으로 뛰어들어 모녀를 끌어올렸다. 지금 되돌이켜 봐도 가장 소름 돋았던 순간이었다.

특전사 시절 그는 화력주특기 담당이었다. 적진에서 저격을 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김 씨.



● 인천공항에서 만난 엄마
북한을 벗어난 지 3주 만에 태국에 도착했고,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탈북민들이 구류돼 있는 감옥에서 다시 두 달을 더 지냈다. 그리고 2013년 3월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 타본 비행기는 너무 신기했다. 인천공항엔 새벽에 내렸다. 다른 탈북민들과 함께 출입구로 나오는데 갑자기 앞에 그의 이름이 적힌 팻말이 보였다.

새벽에 어머니가 마중 나온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대현이니”

어머니는 그를 안고 다시 엉엉 울었다. 인솔자는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재촉할 수 없었던지 5분의 시간을 주었다.

이미 외가 쪽이 다 한국에 와 있어 조사는 많이 받지 않았다. 조사기관과 하나원을 거쳐 한국에 나온 시기는 2013년 8월이었다.

어머니가 살고 있는 청주로 갔다. 청주에 가니 새 아버지와 남동생이 있었다. 저녁에 온 가족이 식당에 모였다. 처음 보는 외할아버지는 물론, 각지에 정착했던 이모들도 다 왔다.

정착 선물이라며 어머니가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처음 봤다. 너무 신기해 식사 내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새로운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새 아버지도 잘 대해주었다. 인근에 있는 학교에 가니 잔디밭이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그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잔디에서 원 없이 뛰니 너무 행복했다.

그의 억양에 신기해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그는 당당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나이에 온 그가 학업을 따라가긴 쉽지 않았다.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탈북청소년 교육에 특화된 경기도 안성의 한겨레중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앞날과 만났다. 일반학교를 다녔더라면 “북한이탈주민도 군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는 설문조사를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제대한 뒤엔 스카이다이빙 뿐만 아니라 가끔 사진을 찍는 취미도 누린다.



● 인생 목표는 나라를 위한 삶
특전사 복무를 통해 김 씨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주었다.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채널A에서 ‘강철부대’가 방영될 때 출연자 중엔 그와 함께 대관령을 행군하던 동기도 있었고, 같은 부대 선후배도 있었다.

“시즌2에서 특전사가 우승했잖아요. 잘 해낼 수 있었다고 믿었어요. 우리가 받은 훈련과 그걸 견디며 키운 정신력이라면 못해낼 일이 없었으니까요.”

요즘 김 씨는 스카이빙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되는 것이다. 이미 200회 넘는 낙하를 했지만, 아직도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10대의 김 씨는 파란 잔디에 끌렸고, 20대의 김 씨는 파란 하늘에 빠져들었다.

30대의 그는 어떤 모습일까.

“스카이다이빙도 이것이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된다면 매력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저는 나라를 위한, 사명감이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제일 먼저 앞장서 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저의 인생 목표입니다. 그러다보니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지 이 선택이 국가와 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것 같습니다.”

그의 또 다른 취미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 솜씨는 전문가 뺨을 칠 정도로 훌륭하다.

그는 요즘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삶의 무대를 한국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계로 넓혀나가려면 영어가 필수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해병대나 공군 등에서 군복무를 마친 탈북 청년들이 늘어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군 복무는 시간낭비가 아닙니다. 탈북민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가장 빠르게 녹아들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청춘과 땀을 바쳤는데 누가 탈북민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겠습니까. ”

“앞으로도 저와 같은 탈북민 출신 국군 하사관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한국에는 3만4000여명의 탈북민이 왔지만, 아직 정상적인 과정을 밟아 장교와 경찰이 된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한 장벽을 넘었듯이, 다음의 장벽도 누군가가 용기 있게 넘어서주길 바랍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