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대표 수문장이었던 이운재가 경기 용인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김병지 강원FC 대표(54)는 K리그 통산 최다 경기 출전 기록(706경기)을 보유하고 있는 전설이다. 김 대표와 쌍벽을 이뤘던 이운재 전 전북 코치(51) 역시 A매치 133경기(115실점)에 출전한 레전드다. 이운재는 2008년 골키퍼로는 처음으로 리그 최우수선수(MVP)에도 선정됐다.
이운재가 2002 한일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호아킨 산체스의 공을 막아내고 있다. 동아일보 DB
많은 팬들의 기억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2002 한일월드컵 8강전 스페인과의 승부차기에서 나온 결정적인 선방이다. 전후반과 연장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이운재는 스페인의 4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슛을 막아내며 대한민국의 4강 신화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5번 키커 홍명보가 스페인 골문을 뚫으면서 승부차기는 한국의 5-3 승리로 끝났다. 지난해 유니폼을 벗은 호아킨은 “당시 실축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축구나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장기적으로는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곤 했다.
2008년 수원의 우승을 이끈 이운재(왼쪽)과 송종국이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이운재는 그해 골키퍼로는 최초로 MVP를 차지했다. 동아일보 DB
다행인 건 좋은 스승과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청주상고(현 청주대성고) 시절이던 1991년 그는 전경준, 박성배, 서혁수 등과 함께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기초가 없던 그는 골키퍼로서의 실력을 실전을 통해 쌓았다. 당시 그는 유인권 감독으로부터는 승부차기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한여름 유 감독이 목에 수건을 감고 나오는 게 골키퍼 훈련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유 감독은 이운재를 상대로 수십 차례 페널티킥을 찼다. 골을 먹는 건 괜찮았지만 방향이 틀리면 불호령이 날아오곤 했다. 유 감독은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공을 차고 또 찼다. 이운재는 “골키퍼로서의 기초가 전혀 없던 내게 그 훈련은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이후 승부차기를 잘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전남에서 뛰던 시절의 이운재의 모습. 동아일보 DB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운재는 “승부차기를 할 때 골키퍼에겐 다섯 번의 기회가 있다. 한두 개만 막아도 내가 이기는 게임”이라며 “골키퍼가 그런 태도를 가지면 차는 선수가 쫓기게 된다. 키커가 잘 찬 공은 그냥 먹는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직접 골을 먹는 골키퍼는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포지션 중 하나다. 작은 실수 하나가 곧바로 실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운재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지도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골키퍼를 골을 막는 게 아니라 먹는 게 일인 포지션”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어린 선수들은 골을 먹으면 자책을 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도 상대가 잘 찬 공은 막을 수 없다. 모든 슛을 막을 수 없기에 최대한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뿐”이라며 “골을 먹어도 스트레스 받지말고 다음을 준비하면 된다. 결정적인 한두 개를 막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런 마음가짐은 그가 40살 가까이 현역 선수 생활을 하는 원동력이 됐다.
자신의 이름을 딴 골키퍼 장갑을 출시한 이운재. 사진출처 낫소 홈페이지
2016년 리우 올림픽 대표팀 코치 시절의 이운재. 동아일보 DB
더구나 그는 타고난 대식가이자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그는 선수 생활 때부터 수원 지역에 오래 살았는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수원에서 괜찮은 고깃집을 찾을 땐 이운재 사인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좋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이운재는 “사실 이곳저곳 맛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인을 해주곤 했다. 지인들을 데려가서 실패한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이운재가 6월 열린 축구인 골프대회에서 샷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단단한 하체에 몸집이 큰 그는 축구계에서도 알아주는 장타자다. 마음먹고 때리면 드라이버로 270m를 쉽게 날린다. 하지만 공을 컨트롤 하기 위해 230~240m 정도만 친다.
워낙 거리가 멀리 나가다 보니 스코어도 잘 나온다. 프로 선수들이 치는 백 티에서 플레이해도 싱글을 친다. 핸디캡은 3 안팎이다. 종종 언더파를 치기도 하는데 베스트 스코어는 몇 해 전 강촌 엘리시안에서 기록한 4언더파 68타다.
그는 “선수 때부터 축구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 선수들과 골프장에서 날리곤 했다”며 “살아있는 공도 몸을 날려 잡는 내가 멈춰있는 공을 제대로 못 친다는 게 신기하면서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는 골프를 칠 때도 승부차기를 막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했다. 이운재는 “실수를 해도 지나간 걸 생각하기보단 다가올 홀을 생각한다”며 “욕심을 내지 않고 순리대로 치는 편이다. 공이 러프에 들어가면 무리해서 투온을 노리기보다는 한 타를 잃더라도 빼 놓고 친다”고 했다.
잠시 현장을 떠나 휴식기를 갖고 있는 그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축구를 통해서 받은 사랑을 축구를 통해 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좀 더 공부를 한 뒤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프로 팀이나 대학 팀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아카데미 같은 것을 수도 있지만 내가 가진 노 하우를 어린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