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 ‘마이너리티리포트’…서초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
서초경찰서 위기협상 전문요원들이 지난달 15일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려는 학생을 설득하고 있다. (서초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 제공)
“단 1초, 신고자에겐 절박한 순간입니다.” 서울 서초경찰서 112상황실 벽면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예방’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지난달 15일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 옥상에 위태롭게 서었던 고등학생을 경찰이 설득 끝에 내려오게 한 사건이 있었다. 출동 경찰관들은 학생에게 “누나야” “형이야”라는 호칭으로 ‘라포’(친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해 마음을 녹였다. 자살기도 현장에 위기협상 전문요원’을 투입해 마음을 돌린 모범적 사례였다.
이 사례의 배경에는 서초서 범죄예방대응과 경찰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김부석 서초서 범죄예방대응과장을 만났다.
일반적으로 ‘위기협상 전문요원’이라고 하면 ‘인질 강도, 납치 테러’ 극을 벌이는 괴한과 대화하는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이전까지는 강력계 소관 위기협상 요원의 역할이 실제로 그랬다.
영화처럼 요원이 인질범과 협상을 벌일 일이 얼마나 될까? 현실에서 그런일은 많지 않다고 김 과장은 말한다. 설령 진짜 일어난다 해도 협상 요원이 휴무이거나 출장 중이라면 유명무실이다. 1초가 급한 마당에 누굴 데려오니 마니 할 여유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협상이 필요한 부서마다 위기협상 전문요원을 심어두는 일이었다. 자살기도자의 성별과 기질을 고려해 남·여 경찰로 성별을 다양화하고 역할과 편제를 다시 구성했다.
김 과장은 올해 4월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있었던 대학생 자살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현장엔 많은 경찰·소방인력이 출동했다. 주차된 차량들을 빼고 에어매트를 준비하는 동안 시간이 있었지만 학생은 바람을 다 넣기 전에 투신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결과였다.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을 목도한 김과장은 ‘설득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구조를 준비하는 동안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남았다. 늘상 벌어지는 자살기도 현장이야 말로 위기협상 요원이 가장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자살기도자에 특화된 위기협상 전문요원을 기획하게 된 배경이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살률을 낮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 과장은 ‘라포’ 형성을 강조 했다. “‘위험하니까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안돼요. “말을 편하게 해도 될까요?, 고마워, 여기까진 어떻게 올라왔어? 힘들었지? 밥은 먹었어? 누나가(형이) 얘기를 잘 듣고 싶은데 조금만 가까이 와줄 수 있을까? 고마워’ 이런 식으로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정서적 교감을 나눠야 해요”
특히 가족 등의 ‘제3중재자’를 함부로 내세우면 안 된다고 했다. 자살기도자의 가정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살 충동을 느낀 게 가족 문제일 수 있는데도, 설득 시키겠다고 현장에 가족을 데려왔다간 갈등을 더 키울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가족이 와서 “이놈자식아,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고 나무라는 것을 그는 봤다.
김 과장은 “전문적인 대화기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어려운 게 아니고, 간단한 대화의 요령”이라며 “그런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삶을 포기하겠다고 올라간 사람을 설득 못 했던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4월의 뼈아픈 교훈을 바탕으로 고민한 결과가 완벽하게 구현된 사건이 지난달 15일 자살기도 현장이었다.
그날 밤 8시 30분경 “10대 학생이 서초구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한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출동해 보니 이 학생은 옥상 끝에서 뛰어내릴 듯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김 과장은 먼저 줄지어 서 있는 소방차와 경찰차의 ‘경광등’을 모두 끄게 하고 주변에서 구경하던 시민들도 모두 해산 조치했다. 그리고 위기협상 전문요원 2명(남1·여1)을 옥상으로 올려보냈다.
“현장에는 경찰 소방 인력이 과도하게 많이 와요. 와서 경광등을 다 켜놓고 있으면 자살기도자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요. 주변 옥상에는 시민들이 다 올라가서 보고 있어요. 그럼 자살기도자는 ‘나를 주시하고 있네. 어항 속에 물고기가 됐네? 나는 이제 떨어져야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돼요. 주변에서 기대하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돼요. 심리학에서 말하는 '라벨링 효과(Labeling Effect)'가 나타나게 됩니다.”
옥상으로 올라간 요원 2명은 차분한 환경 속에 대화를 시도했다. 그사이 만약을 위해 1층 바닥에 에어매트를 설치했다.
“배 안 고파?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자연스러운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엔 거부반응을 보이던 학생은 차츰 마음을 열었다. 요원들은 학생이 아래쪽을 바라볼 때마다 “OO아 누나 봐야지, 누나 여기 있어. 누나가 얼굴 보고 싶어서 그래”라는 말로 다독였다. 말에 반응해 줄 때마다 “고마워”라는 말로 화답했다.
학생은 “휴대전화 보조 배터리를 달라”며 한층 마음이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요원은 그때 주요 협상기술 중 하나인 ‘기브앤테이크’ 기법을 떠올리며 “보조배터리를 줄게. 대신 누나가 직접 건너가서 전달해 주면 안 될까?”라고 제안했다. 학생은 마침내 ‘그러면 제가 넘어갈게요’라며 난간 안쪽으로 다가왔다. 요원들은 학생이 내민 손을 붙잡아 안전한 곳으로 끌어냈다.
“당하는 시민은 비상벨 못 눌러”
서초경찰서 112상황실
올해 들어 인적 드문 곳에 설치하기 시작한 ‘AI 비명인식 비상벨+지능형 CCTV’도 범죄예방대응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지난해 관악산 생태공원 둘레길에서 ‘최윤종 강간 살인 사건’이 있었다. ‘살려주세요’라는 여성의 비명을 들은 등산객의 신고로 범인은 현장에서 검거되었지만 국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지자체는 그 동안 범죄 취약지 위주로 ‘누르는 비상벨’을 설치해 왔지만 일각에선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뒤따랐다.
“지금 괴한에게 당하고 있는 시민이 비상벨을 누를 수 있을까요? 범인을 제치고 누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피해자는 위급한 상황에서 비상벨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최근 40대 여성이 승강기 안에서 괴한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여성이 제일 먼저 한 게 ‘살려주세요’라는 비명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대신 신고해 주는 ‘비명 인식 비상벨’이다. 이 비상벨은 사람의 비명만 정확하게 인지해 낸다. 물소리, 바람소리, 기차소리, 군중소리 속에서도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사람의 외침만 잡아낸다.
비명이 입력되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자동으로 상황실에 신고가 접수된다. 벨에서는 “경찰관을 호출 중입니다”라는 경고방송이 나온다. 벨에 연동된 지능형 CCTV는 비명이 들린 곳으로 카메라를 비춘다. 이 모든 절차가 한 번에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경찰 호출’ 멘트가 흘러나오면 범인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도망갈 수밖에 없게 된다. 카메라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비추기 때문에 112상황실에서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범인을 추적할 수 있게 된다.
서초서 범죄예방대응과는 전국 최초로 이런 첨단 장비를 도입해 대응하고 있다. 현재 관내 산책길 둘레길 공원 등 19개 장소에서 시범 운영 중이다.
어두운 골목길 수상한 그놈, 지켜보고 있다
서초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 제공
서초경찰서는 지난 3월부터 서초구청 CCTV관제센터와 함께 매일 시간대별, 장소별 범죄 취약지를 선별해 ‘CCTV 화상 순찰’을 하고있다. 화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112상황실에 통보한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주택가. 검은 마스크와 모자를 쓴 남성이 가방을 메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서초구청 CCTV 관제센터 경찰관은 이 남자를 모니터로 유심히 지켜보다가 112상황실에 통보했다.
경찰은 즉시 출동해 현장에서 300m를 추격한 끝에 남자를 잡았다. 남자의 가방에서는 필로폰이 나왔다. 이른바 ‘던지기’ 마약범이었다. 특정 장소에 마약을 놓고 사진을 찍어 구매자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경찰은 남자의 휴대전화 속 사진을 토대로 서울 반포동과 양재동 주택가 일대에 숨긴 마약 봉지 18개를 회수했다. 약 1550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었다.
서초경찰서 범죄예방대응과 제공
‘영상 순찰’은 단순한 ‘영상 시청’이 아니다. 목적의식을 갖고 영상을 지켜보는 것이다. 사전에 취약지를 시간대별 장소별로 선정해 실제 현장에 나간 것처럼 집중 관찰한다. 이를테면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음주운전자가 많은 강남역 주변을 집중적으로 본다. 여름철 호우주의보가 있는 날에는 한강과 양재천 주변으로 카메라를 돌려본다.
“이게 바로 ‘과학 치안’입니다. 옛날처럼 도보나 순찰차를 이용한 순찰만으로는 인적 물적 한계가 있어요”
서초구에는 5000여 대의 방범용 CCTV가 있다. 이걸 24시간 순찰에 적극 활용하여 범죄예방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김 과장은 “시시각각 변하는 치안 환경에 앞서 나아가서 치안 역량을 치안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면서 “시대적으로는 과학 치안과 예방 치안 그리고 감동 치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