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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철’ 탈 때마다 “전생 무슨 죄”…헬조선 대표작 ‘한국이 싫어서’ 원작 비교[선넘는 콘텐츠]

입력 | 2024-08-26 17:00:00


영화 ‘한국이 싫어서’에서 여성 ‘계나’(고아성)가 방황하는 모습. 배우 고아성은 22일 인터뷰에서 “직장생활을 수년쯤 하면서 지쳐 버린 청춘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디스테이션 제공


추운 겨울, 해가 뜨기도 전 어두컴컴한 새벽. 집에서 머리카락도 말리지 못하고 급하게 뛰어나간다. 사람들이 가득한 초록색 마을버스를 탄다. 정거장 12개를 지나 내린다. 지하철 1호선에 몸을 싣는다. 서울로 가려는 사람들로 지하철도 만원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다. ‘지옥철’에선 스트레칭조차 사치다.

신도림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탄다. 다시 12개 정거장을 가 강남역에 내린다. 강남역 근처 회사로 뛰어간다. 엘리베이터도 발 디딜 틈이 없다. 겨우 ‘대리’라는 직함이 붙어 있는 회사 자리에 도착해 외투를 벗고 한숨을 쉰다. 집에서 회사까지 걸린 시간만 2시간. 출근길이 아니라 전쟁을 치른 것 같다.


계나에게 한국 직장생활은 끔찍하다. 디스테이션 제공


‘지옥철’ 2번 환승

28일 개봉하는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20대 후반 여성 ‘계나’(고아성)가 행복을 찾아 직장과 가족을 두고 한국을 떠나는 이야기를 다뤘다. 장강명 작가가 2015년 펴낸 동명의 소설이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기며 35번이 넘는 시나리오 각색을 거쳤다.

소설에서 계나는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 산다. 아현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역삼역까지 간다. 만원 ‘지옥철’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계나는 이렇게 분노한다.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때는 매일 울면서 다녔어. 회사 일보다는 출퇴근 때문에.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신도림에서 사당까지는 몸이 끼이다 못해 쇄골이 다 아플지경이야. 사람들에 눌려서. 그렇게 2호선을 탈 때마다 생각하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험 사기라도 저질렀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생각해. 너희들은 무슨 죄를 지었니?”

뉴질랜드에서 행복해하는 계나. 디스테이션 제공


그런데 소설에서 계나는 환승하지 않고 지하철로 22개 정거장을 간다. 지하철 시간으로 44분이 걸린다. 집에서 아현역까지 나오는 시간과 지하철에서 회사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1시간을 살짝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면 영화에서 계나는 서울이 아닌 인천에 산다. 한 번도 환승하지 않는 소설과 달리 2번 환승하고, 출근 시간은 1시간에서 2시간으로 늘었다. 장거리 출퇴근 직장인의 애환을 더 극적으로 보여줘 계나의 고통을 관객이 공감하게 만든 것이다.

또 소설이 발표됐을 때와 영화가 개봉했을 때 9년 사이 더 치솟은 서울 집값,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로 폭발한 장기 출퇴근자들의 고통까지 느껴지는 듯 하다. 배우 고아성은 22일 인터뷰에서 “직장생활을 수년쯤 하면서 지쳐 버린 청춘을 표현했다”고 했다. 장건재 감독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사회는 저마다의 지옥을 품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영화 포스터. 디스테이션 제공


빌딩숲 대신 자연에서 뛰놀다

계나가 떠나는 나라도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바뀌었다.

소설에서 ‘계나’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다. 호주는 1995년부터 워킹홀리데이 협정이 맺어진 나라. 모집 인원과 모집 자격에도 별다른 제한이 없다. 나이 조건만 맞으면 누구나 올 수 있다. 매해 호주로 떠나는 한국인이 4만 명에 이를 정도다. 많은 젊은 독자가 쉽게 공감할만한 장소다. 소설에서 계나는 대한민국의 국가와 호주 국가를 비교하며 호주의 자유로움에 대해 예찬한다.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이야. 호주 국가는 안 그래. 호주 국가는 주 사람들이여, 기뻐하세요. 우리들은 젊고 자유로우니까요.고 시작해. 그리고 우리는 빛나는 남십자성 아래서 마음과 손을 모아 일한다., 없는 땅을 나눠 가진다.’고 해. 가사가 비교가 안 돼.”


계나는 뉴질랜드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디스테이션 제공


반면 영화는 배경을 뉴질랜드로 바꿨다. 특히 영화는 뉴질랜드의 광대한 풍경을 곳곳 비춘다. 한국에서 도심 빌딩숲에 살며 햇빛조차도 마음껏 쬐지 못했던 계나가 뉴질랜드에 와선 해변가에서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고 대자연 앞에 서는 장면을 카메라로 비춰 대비시킨 것. 한국에선 늘 패딩과 코트만 입고 있던 계나가 뉴질랜드로 이민온 뒤 짧은 반바지와 나시 티 등 자유로운 의상을 입고, 새까맣게 타 버린 피부로 자연을 활보하는 모습은 계나의 행복을 상징한다.

장건재 감독은 “뉴질랜드가 특히 여성인권이나 자연의 생명권을 소중히 한다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 영화에 은유적으로 쓰인 동화 ‘추위를 싫어한 펭귄’의 주인공 ‘파블로’가 떠나는 남쪽의 따뜻한 나라의 이미지에도 뉴질랜드가 적합했다”고 했다.


뉴질랜드엔 계나와 비슷한 처지의 청년이 많다. 디스테이션 제공


● 버텨 성공, 떠나도 우울

소설은 계나가 한국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부당한 지시를 받아도 오로지 참는 것을 미덕이라 강조하는 한국 사회의 수직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학생 때는 똑똑하던 여자애들이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바보 되는 거 많이 봤다”며 한국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낯선 땅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도 비중 있게 비춘다. 뉴질랜드 영주권을 얻은 ‘상우’(박성일)가 밤이면 할 일 없는 뉴질랜드 삶에 답답해하고, 항상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는 장면을 통해 한국을 떠난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계나의 옛 남자친구 ‘지명’(김우겸)이 한국에서 취업에 성공한 뒤엔 깨끗한 오피스텔에 사는 모습을 비추며 한국에 남아 있는 이들이 불행이나 슬픔에 갇혀 사는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계나의 뉴질랜드 생활도 물론 만만치 않다. 디스테이션 제공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영화의 관점이 원작과 차이를 보이는 건 ‘헬조선’이란 단어가 유행했던 2015년 출간 당시와는 사뭇 달라진 현재 한국 대중의 시각을 반영한다. 23일 기자간담회에서 “뉴질랜드를 낭만화하려 하지 않았다”(장건재 감독), “‘지명’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아성 배우)는 발언이 나온 이유다.

대신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건 ‘생존’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지옥을 품고 살아간다.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라는 장 감독의 말처럼 여성이든 남성이든, 청년이든 중년이든 우리는 결국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아닐까.


소설 표지.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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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