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이 6월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 지뢰 매설 작업을 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 제공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우발’의 뜻을 찾아봤다. ‘우연히 일어남 또는 그런 일’, ‘예기치 않게 우연히 발생함’이라고 풀이돼 있었다. 반대말은 ‘고의’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실 한자인 ‘偶發’을 그대로 풀어 봐도 금세 뜻을 알 수 있는 단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재임 중 체결한 9·19 남북 군사합의를 현 정부가 전면 무효화한 데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과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막아 주는 안전핀 역할을 스스로 무력화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여 년간 국방부를 출입하면서 북한의 숱한 도발을 취재한 필자로선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단언컨대 북한의 대남 도발은 단 한 번도 우발적으로 발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고 지휘부의 지시나 묵인 아래 우리 군 장병과 국민의 생명을 노리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한 도발이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은 말할 것도 없고, 군사분계선(MDL)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에서 벌어진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이 ‘의도적 기습’이라는 실체적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우발을 가장한 기만술로 우리 군의 대응을 유도한 뒤 남측이 도발했다면서 남남갈등을 노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전에서 산화한 서해수호 55용사를 비롯해 북한 도발에 희생된 우리 국민은 ‘우발적 충돌’의 피해자가 아니다.
과거 북한의 도발 징후를 우발적 상황으로 간과했다가 군은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다.
2002년 6월 29일에 발생한 제2연평해전이 대표적 사례다. 도발 몇주 전부터 북한 경비정이 잇달아 서해 NLL을 침범했지만, 군은 북한 어선을 단속하는 과정에서 우발적 월선으로 속단했다. 필자를 비롯한 취재 기자들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도발 징후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지만, 군은 긴장을 풀었다. 결국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고속정을 기습 포격하는 도발로 꽃다운 나이의 우리 장병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후과를 치렀다.
그런데도 문 전 대통령이 ‘우발적 충돌’을 언급하는 것은 북한의 선의에 기대어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2018년 9월 평양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수만 명의 평양 시민이 보여준 환대가 진심이었다고 믿는 듯하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가족과 함께 귀순한 리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측의 모든 대통령들은 북한에 의해 철저히 속았다. 마지막에 별 수모를 다 받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렇게 당하고도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자가 북한 정권의 실체를 이다지도 모를 수 있냐는 일갈로 들린다.
이 같은 비판의 책임에서 군도 자유로울 수 없다. 진보정권이 집권하면 대북 유화 코드에 맞춰서 북한의 도발과 위협을 ‘수위 조절’하거나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쏜 탄도미사일을 ‘단거리 발사체’라고 발표하고, 구체적인 내용도 비공개로 일관하면서 ‘안보 불신’을 자초했다는 질타를 받았던 교훈을 군은 곱씹어 봐야 한다.
미사일 발사와 무인기 침투,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교란에 이어 대남 오물풍선까지 잇달아 살포하는 등 북한의 대남 도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