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2022년 계획수립 뒤 제자리 반도체-AI 등 전력공급 차질 우려
경기 하남시 동서울변전소로 연결되는 송전탑. 한국전력은 2026년 6월 준공을 목표로 동서울변전소 증설 사업을 추진했으나 주민 반발 등으로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하남=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한국전력이 2022년 수립한 송변전 설비 신규 건설사업 112건 중 6월 말 현재 공사를 시작한 사업은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약 3년의 건설 기간을 감안하면 최소 19개 사업은 목표한 2027년까지 송변전 설비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신산업이 성장할수록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인프라 사업이 계속 차질을 빚으면 국가 성장동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6일 동아일보가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전의 10차 송변전 설비계획 현황 자료에 따르면 112건의 신규 송변전 건설사업 중 6월 말 기준 착공 및 준공은 0건으로 집계됐다. 용역 설계 및 기초자료를 검토하는 준비 단계가 60건(53.6%), 입지 선정 단계가 52건(46.4%)이었다. 10차 계획은 2022년부터 2036년까지 전국 각지에 송변전 설비를 언제, 어디에 세울지에 대한 계획을 담고 있다.
한전은 2027년까지 19개 송변전 설비를 지을 계획이다. 하지만 착공부터 준공까지 3년 안팎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목표 달성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역주민의 반대, 지방자치단체의 비협조 등으로 사업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것이다. 2026년 6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동서울변전소’ 사업이 대표적이다. 동해안에서 끌어온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핵심 관문으로 최근 경기 하남시가 건설 불허 처분을 내렸다. 이 사업이 막히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추진하고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전력망 지연땐 반도체 산단 치명타… “정부가 주민 설득 나서야”
송변전 설비계획 112건, 착공 ‘0곳’
주민들 반발, 지자체는 소극 대처… 동해-서해안 연결 사업 줄줄이 지연
산단 투자기업들 “계획 못믿겠다”… “한전만으로 주민 설득 한계” 지적
주민들 반발, 지자체는 소극 대처… 동해-서해안 연결 사업 줄줄이 지연
산단 투자기업들 “계획 못믿겠다”… “한전만으로 주민 설득 한계” 지적
‘주민도 모르게 증설한 발전소 결사반대’, ‘얼마나 더 죽어 나가야 정신을 차리나’.
8일 찾은 경기 하남시 동서울변전소 진입로에는 한국전력을 규탄하는 현수막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동해안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끌어오는 핵심 관문인 이곳은 급증하는 수도권 첨단 산업 전력 수요를 맞추기 위해 한전이 증설하려는 곳이다. 바깥에 노출돼 있던 변전 설비를 건물 안으로 집어넣고 기존 부지에 변환소(직류 교류 간 전환)를 새로 지을 계획이었다.
일부 지역 주민들은 변전소를 발전소로 오해하거나 “전자파가 건강을 해친다”며 반대했고 하남시도 결국 건설 불허로 돌아섰다. 하남시는 21일 “주민들의 생활 환경을 해치고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건설 불허 처분을 내렸다.
송변전 설비 공사를 둘러싼 갈등은 전국 곳곳에서 현재 진행 중이다. 전력 공급이 필수인 반도체, 인공지능(AI), 배터리 등 한국 첨단산업 미래에 비상등이 켜진 것이다.
● 10개 송변전 사업 중 7개 삽도 못 떠
동서울변전소와 연계된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 사업은 당초 계획대로라면 2019년 12월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주민 반대 등으로 5년 이상 지연됐다. 내년 6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불확실하다. 사업 대상 주민 90%와 협의를 마쳤는데 지난달 한 환경단체가 “모든 사업을 백지화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건설 지연의 가장 큰 원인은 주민들의 반발과 지방자치단체의 소극적 대처가 꼽힌다. 전자파를 둘러싼 ‘괴담’도 떠돈다. 지자체, 환경단체, 국회의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한전만으로는 주민 설득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산업계 “송변전 계획 믿고 어떻게 투자” 불만
송변전 설비 건설 사업이 계획과 달리 늦춰짐에 따라 전력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대규모 정전사태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만의 경우 반도체 산업 전력사용량이 최근 5년 만에 41.6% 급증함에 따라 대규모 정전 사태가 잦아져 세계적 공급 대란 공포까지 빚었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 등 첨단 산업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인 한국도 전력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26년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고 SK하이닉스는 내년 착공해 첫 공장을 2027년 5월 준공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은 2042년 7GW, 2053년 14.7GW다.
정부는 한전 산하 발전 3사의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에 더해 호남, 동·서해안 발전 전력을 끌어와 충당한다는 계획이지만 반도체 기업들은 예정대로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언제 완공될지 모르는 전력망 사업을 보면 투자 계획도 보수적으로 잡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첨단산업계에선 정부 주도의 컨트롤 타워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무총리 산하 범부처 기구를 만들고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개선하는 전력망 특별법이 지난해 발의됐지만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도 논의 중이지만 언제 통과될지는 불투명하다. 박주헌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송전망 확충에 문제가 누적된다면 우리 미래 산업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인 리스크가 될 것”이라며 “더 이상 한전에 모든 걸 맡기기엔 자원과 역량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하루빨리 정부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남=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