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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부채 역주행’, 빚에 포위된 한국 경제

입력 | 2024-08-27 03:00:00

코로나 뒤 GDP 대비 부채 비율
세계 평균 285%→245% 줄었지만
韓 가계-기업-정부 251%로 늘어
한은 ‘부채 덫’ 걸려 금리인하 딜레마





‘코로나 사태’ 이후 선진국들이 빚을 줄여가는 동안 한국에서는 가계·기업·정부 등 경제주체들의 부채 수준이 오히려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서민·중소기업 지원과 상생 등을 명분으로 대출금리 상승을 인위적으로 틀어막고 이자 환급 등 무리한 시장 개입을 한 결과 가계와 기업부채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결과로 해석된다.

고금리로 인한 이자 부담이 임계점에 다다랐지만 한국은행은 막대한 가계빚 때문에 금리 인하에 섣불리 나설 수 없고, 정부도 쌓여가는 국가부채 때문에 재정 여력에 한계가 있다. 한국 경제가 ‘부채의 덫’에 걸려 사방으로 포위된 형국이라는 진단마저 나온다.

26일 한국은행과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현재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기업·정부 부채 비율은 251.3%로 집계됐다. 코로나 사태 당시인 2020년 4분기(242.7%)보다 더 증가한 것이다. 반면 선진국의 부채 비율은 같은 기간 319.3%에서 264.3%로 급격히 감소했다. 전 세계 평균도 같은 기간 285.4%에서 245.1%로 줄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시계를 넓혀 봐도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9년 1분기 67.7%에서 작년 4분기 93.5%로 급증한 반면 선진국들은 76.4%에서 71.8%로 오히려 줄었다. 가계 소득보다 빚의 증가 속도도 훨씬 빠르다. 한국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비율(DTI)은 2008년 138.5%로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2022년 말에는 203.7%로 급등했다. 선진국 평균은 같은 기간 164.4%에서 160.7%로 오히려 낮아졌다.

한국의 부채 위기는 고금리 환경에서 고통스럽더라도 빚을 줄여나가는 정공법을 쓰지 않고, 빚내는 것을 용인하며 부실기업을 연명시키는 진통제 처방에 의존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은은 “부동산 관련 대출 수요가 이어지는 가운데 금융지원책이 주요국보다 장기간 지속된 데 따른 것”이라고 진단했다.




빚 권하는 정책… 이자 돌려주고, 상환 미뤄주고, 구조조정 지연
[빚에 포위된 한국 경제] 〈상〉 세계는 빚 줄이는데 나홀로 역주행
근본해법 외면한 금융 지원 정책에… 가계, 부동산 수요 늘며 대출 급증
기업, 금융지원 믿고 ‘빚 폭탄’ 키워… 정부, 공공요금 동결→부채 더 늘어


주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의 부채가 ‘나 홀로’ 불어난 배경에는 취약계층이나 부실 기업에 대한 지원 일변도의 금융정책이 자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부채 관리를 외치면서도 자영업자의 부실대출 상환을 유예하고 상생금융 명목으로 이자를 돌려주는 등 과도한 금융 지원으로 ‘빚 폭탄’을 키우는 한편 공공요금을 동결하며 나랏빚을 늘렸다는 것이다.

● 총선 전부터 쏟아진 지원 일변도 금융정책

지난해 말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의 종노릇’ 발언과 그에 뒤이은 일련의 조치들은 가계 대출에 불을 지피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자영업자들께서는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마치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셨다”고 했다. 이에 은행권은 화들짝 놀라 개인사업자 대상 ‘이자 캐시백(환급)’을 담은 2조 원 규모의 상생금융 방안을 내놨다. 정부의 압박에 이미 거둔 이자도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고금리로 생계가 어려워진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전례를 찾기 힘든 이자 환급 조치는 적지 않은 부작용도 뒤따랐다. 대출은 얼마든지 받아도 되며 이자를 갚지 못하더라도 결국엔 정부나 은행이 깎아줄 것이란 메시지를 던져준 것이다.

앞서 지난해 1월엔 윤 대통령이 은행이 이자 장사를 한다며 “은행은 공공재”라고 언급하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시중은행들을 순회 방문해 상생금융이라는 명분으로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그 결과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2021년 8월 0.75%에서 2023년 8월 3.50%로 2.75%포인트 오르는 금리 인상기에 가계의 평균 주담대 금리는 2.88%에서 4.31%로 1.43%포인트 상승하는 데 그쳤다. 정부의 이런 시장 금리 개입은 한은의 긴축 통화정책을 무력화시켰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부의 압박으로 상대적으로 덜 뛴 대출금리가 부동산 수요를 자극하며 가계대출 증가를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상반기까지 공공요금 동결 기조를 유지해온 것은 고스란히 공기업 부채 증가로 이어졌다. 전기요금은 5개 분기 연속 동결된 상태이고, 가스요금은 지난해 5월 인상 이후 올해 7월까지 동결됐다가 이달이 돼서야 인상됐다.

● 부실 기업은 저금리 대출로 연명

코로나 사태 이후 정부의 자영업자·중소기업 지원책도 일부 빚으로 연명하는 한계 기업들의 숫자만 늘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로 코로나19 금융 지원으로 소상공인들에게 170조 원 상당의 대출 원금과 이자 상환을 유예해줬고, 해당 금융 지원 조치는 5차례나 연장했다.

최근 한은이 발표한 ‘2023년 경영분석’에 따르면 국내 기업 10곳 중 4곳이 한 해 동안 번 돈으로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한계기업’이었다. 정부의 금융 지원으로 좀비기업들이 구조조정되지 못한 탓이다. 한계기업이 링거(정부 지원)로 연명하지 않도록, 부실 관리와 함께 자영업자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의 금융 지원은 근본적인 해결보단 뒤로 문제를 미루는 성격이 강하다”며 “실증적인 기반이 취약한 정책을 마구 쓴다는 것은 인기 영합적 측면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가계부채의 경우 경제 성장에 따라 절대 규모가 증가한 측면이 있다”면서 “2021년까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증가했지만 2022년, 2023년에는 감소했다”고 해명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