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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칼럼]한국 좌파, ‘부자와의 공생’ 배울 수 있을까

입력 | 2024-08-27 23:22:00

여야 정치권 중산층 겨냥 상속세 완화 경쟁
최고세율 인하·최대주주 할증 폐지엔 무관심
‘세금 망명’ 통해 기업 소중함 깨달은 스웨덴
비합리·비이성적 대기업 차별 넘어서야



박중현 논설위원



1983년 10월 4일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기업인 시위가 스웨덴에서 발생했다. 10만 명 가까운 스웨덴 기업인들이 열차, 버스, 승용차를 타고 수도에 집결했다. 전국에서 모인 기업인들이 ‘세금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스톡홀름 도심이 마비됐다. 성정이 차분하기로 유명한 스웨덴인, 그중에서도 돈 많은 기업인들이 이런 대규모 집회를 연 건 노조와 집권 사회민주당이 도입을 추진하는 ‘노동자 기금’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 기금 법안은 매년 모든 기업의 순이익 20%를 기금에 적립하도록 의무화하고, 이 돈으로 노조가 기업 지분을 사들여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기업인만 배불리는 부(富)를 노동자가 공유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는데, 20∼30년 뒤면 모든 기업의 최대 주주가 노조가 될 판이었다. 힘들게 번 돈을 뺏어 가는 것도 모자라 이걸 지렛대로 노조와 정부에 기업을 헌납하게 된 기업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경제계의 반대에도 사민당은 다른 좌파 정당과 손잡고 그해 12월 노동자 기금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3년 뒤 스웨덴의 세계적 가구업체 이케아(IKEA)는 네덜란드로 본사를 옮겼다. 60%의 법인세 최고세율, 70%의 상속세 최고세율과 함께 노동자 기금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테트라팩 등 다른 간판 대기업의 해외 이전도 줄을 이었다. 당연히 일자리가 감소하고 경제는 침체됐다. 금융위기까지 이어지면서 스웨덴의 경제성장률은 1990년대 초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1991년 집권한 우파 정부가 노동자 기금을 폐지했을 때 사민당, 노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최근 한국 국회에서 상속세 개편을 둘러싼 여야의 신경전이 한창이다. 수십 년째 바뀌지 않은 상속세 체계를 고쳐 수도권에 집 한 채 정도 가진 이들의 배우자, 자녀 상속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여야가 경쟁적으로 감세안을 내놓고 있다. ‘부자 감세’ 비판을 입에 달고 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내의 일부 반발에도 상속세 감면 의지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지난 대선 때 0.73%포인트 차로 정권을 잡지 못한 이유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중산층에서 표가 덜 나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가 제안한 상속세 최고세율 인하, 최대주주 할증 폐지엔 여전히 부정적이다. 50%인 상속세 최고세율을 40%로 낮추고, 실질 상속세 부담을 60%로 늘리는 최대주주 할증을 없애는 건 극소수 부유층에 혜택이 가는 일이라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에선 실질 상속세 부담을 70%로 높이는 법안까지 나왔다. 여당 역시 표와 직결되는 중산층 세 부담 완화에만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최고세율 인하, 할증과세 폐지는 여야의 상속세제 최종 합의안에서 빠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5%인 일본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상속세 할증은 대기업 최대주주가 주식을 물려줄 때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려해 과세표준 금액을 20% 늘려 잡는 것이다. 획일적 할증 기준을 적용해 경영권 가치에 세금을 더 물리는 나라는 선진국 중 한국뿐이다.

1980년대 기업 유출 사태를 겪은 후 스웨덴 사민당의 기업 정책 방향은 180도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재집권한 사민당 정부는 대기업 해외 이전에 대해 사과하고, 국민과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환경을 악화시킬 정책을 다시는 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장기 집권을 하면서도 약속을 잊지 않았다. 2005년 스웨덴에서 상속세가 폐지된 이유다. 상속세 대신 도입된 자본이득세는 물려받은 주식 등을 처분하는 시점에 내기 때문에 기업 활동을 중단하거나, 지분을 팔기 전에는 피상속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스웨덴 좌파는 노동자 기금 사태와 ‘세금 망명’을 겪으면서 기업의 지분과 오너십을 노동자가 뺏어서 나눠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공장, 생산설비처럼 사업을 영위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다. 스웨덴을 최고의 복지국가로 이끈 사민당은 지금까지도 ‘기업의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란 강령을 유지하고 있다. 실패에서 배운 교훈을 기억하는 ‘친기업 좌파’ 덕에 스웨덴의 선진국 위상은 굳건하다. 스웨덴 인구 중 억만장자 비중은 미국보다도 훨씬 높다. 스웨덴 좌파가 수십 년 전 깨달은 ‘부자와의 공존 방법’을 한국의 좌파가 배우려면 기업인들의 집단시위, 기업들의 세금 망명이라도 겪어봐야 하는 걸까.

박중현 논설위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