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쌓여 답답한 기운이 누적된 화병(火病)이 한때 한국인에게만 있는 질병이라고 해 미국 정신질환 분류 체계에 ‘Hwa-byung’으로 등재된 적이 있다. 참는 게 미덕인, 가부장적이고 유교 문화권인 한국에서 자주 관찰되는 장애라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특정 문화권에서 일관되게 발견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삭제되긴 했지만, 화가 난 한국인이 많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가슴속에 열불’이 나고 ‘단전에서부터 깊은 빡침’을 느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는 진단 역시 이를 뒷받침해 준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이 최근 만 18세 이상 남녀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연구진은 부당하고 모욕적이며 신념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되는 스트레스 경험에 대한 반응을 울분으로 봤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장기적 울분 상태였고, 이 가운데 9%는 ‘심각한 수준’의 울분을 겪고 있었다.
▷특히 30대에서 심각한 울분을 겪는 비율이 14%로 가장 높았다. 30대는 울분이 적은 정상 상태의 비율도 가장 낮았고,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비율도 가장 낮았다. 지금의 30대는 대학 졸업이나 취업,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전환점을 부모 세대보다 수년씩 늦추거나 포기한 ‘지각 세대’, ‘N포 세대’의 대표 격이다. 눈높이를 낮춰도 취업이 힘들고, 내 집 마련은 불가능에 가깝고, 아이를 낳아도 돌봄 불안과 사교육비에 시달리니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한 결과다.
▷앞서 세 차례 실시한 울분 조사와 비교하면 올해 결과가 가장 나쁜 편은 아니다. 하지만 5년 전 독일에서 진행된 비슷한 조사에서 장기적 울분 상태인 사람이 15%에 그친 것과 견주면 한국인은 독일 국민보다 세 배 이상 울분에 찬 상태다. 심각한 울분 상태인 한국인 10명 중 6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개인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긍정과 배려, 공정의 힘을 길러 울분을 줄이고 예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