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선 열흘만인 2022년 3월 20일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는 조선 총독 때부터 100년 이상 사용해 온 제왕적 권력의 상징”이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29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 취임 후 두 번째 국정브리핑, 세 번째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있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인적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해도 좋다. 청와대가 제왕적 대통령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29일 열린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발언하는 모습.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번 윤 대통령의 국정브리핑과 기자회견은 6월 국정브리핑, 5월 기자회견과 놀랍게 흡사했다. “경북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는 첫 국정브리핑처럼 이번 브리핑도 홀로 장밋빛이다. 경제도, 의료개혁도 차질 없이 펄펄 날고 있었다. 다수 국민의 인식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인식이다. 용산과 한남동은 구름 속에 묻힌 구중궁궐이란 말인가.
요즘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윤 대통령은 모른다. 대한민국 최고 의사가 주치의요, 진료과목마다 자문의가 버티고 있는 대통령이 아픈들 (그럴리야 없겠지만) 설령 다친들 큰 일이 날 리 없다. 보통사람은 다르다. 노부모와 따로 사는 집에선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 한다. 아이 키우는 집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열 나거나 다치기라도 할까봐 뛰는 아이도 주저앉힐 정도다.
25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서 고령 환자가 입원을 기다리고 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의대 증원 문제가 응급실 마비 사태로 번진 지금, “아프지 말라”가 새 인사말이 됐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에선 관리가 잘 되고 있다니 미치고 팔짝 뛸 판이다. 현장과 대통령실의 메시지 차이가 큰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역정을 감추지 못했다. “의료현장을 한번 가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며 “특히 지역의료종합병원 이런 데 가보시고 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있지만 일단 비상진료체제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는 거다.
대통령이 본 지역병원 응급실은 잘 돌아갔을 수 있다. 참모진이 미리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들이 헌신적으로 뛰고 있는 곳’을 찾아 놓고 방문케 한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이 바로 간신이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26일 한 인터뷰에서 “오늘 전라도 남쪽에서 교통사고 난 환자가 전국에 받아주는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 결국 죽었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했다. 이게 진짜 응급실 현장이다. 대통령 심기경호에만 골몰하는 제왕적 참모진에 둘러싸여 윤 대통령은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 검찰 수사하듯 밀어붙인 윤석열표 개혁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그랬다.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1984년 탄광노조 파업과 맞섰을 때다. 석탄발전소에 미리미리 석탄 재고량부터 충분히 쌓아놓고서야 탄광 폐쇄를 발표했다. 노조가 석탄 반출을 막아 국민이 난방을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놓고 정책 발표를 한 것이다.
지금 국민이 느끼는 가장 심각한 의료문제는 지역의료‧필수 의료가 불안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제 의대 증원이 마무리된 만큼, 개혁의 본질인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브리핑에서 밝혔다. 미치겠다! 그게 개혁의 본질임을 알고 있었으면 그것부터 시작해야지, 왜 곁가지부터 건드려 이 지경을 만든단 말인가.
“재정투자를 하고 사법리스크를 감축시키고, 보험수가를 조정해 필수의료, 중증의료, 수술, 이런 과거 기피하던 부분들이 의사들에게 더 인기 있는 과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제는 우리 정부 남은 기간 동안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이라고 윤 대통령은 한가롭게 말했다. 그런데 의료인 양성은 지금 안 하면 늦어서 덜컥 증원부터, 그것도 매년 2000명에서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거다.
정말 미치겠다. 의대 정원 늘려 등록금도 위세도 키울 수 있는 대학 총장들은 백 명이고, 천 명이고 써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가르칠 의대 교수들이 갑자기 늘어난 그 많은 숫자는 도저히 못 가르친단다. ‘바이탈뽕’에 병원을 지키던 전공의도, 장밋빛 꿈에 의사 공부를 시작한 의대생도 의사를 악마화한 윤 정부 특히 박민수 복지부 차관에 질려 그 어렵게 들어간 병원을, 의대를 나섰다. 석탄 비축량을 미리 쌓아놓으려면 정부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는 재고 점검도 없이 대뜸 압색부터 시작한 꼴이다.
그렇게 ‘윤석열 검찰’은 살아왔을 터다. 나중에 대법원 무죄가 나와도 알빠노(‘알 바 아니다’‧리그 오브 레전드 인터넷 방송 관련 유행어이자 신조어란다)다. 당한 사람들 인생만 절단나도 검찰은 지장없다.
현실세상은 다르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이다. 주치의 두고 든든한 대통령은 죽어도 “의대 증원 마무리 됐다”에서 물러서지 않겠단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운을 뗀 ‘2026년 재검토’ 도 묵살하고 다른 대안도 없이 계속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라면…2027년 3월 대통령선거는 뻔하다.
그럼 윤 대통령이 (남의) 목숨 걸고 밀어붙인 의료개혁은 2026년까지 4000명 증원에서 끝나고 만다. 그래도 좋단 말인가.
● 한남동 증축, 왜 하필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냐
한남동 관저에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 증축됐다고 한다. 국회에서 천하람 개혁신당 의원이 “2022년 8월 관저 리모델링 때 2층에 14평 증축한 기록은 있는데 증축 내역이 없다”고 질문하면서 불거진 내용이다. 대통령실은 국가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내용이라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 늘린 시설이 서재도 아니고, 운동실이나 온실도 아니고 하필 사우나실과 드레스룸이라는 데는 그만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 구중궁궐에 살기에 윤 대통령의 경제 인식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대통령은 브리핑에서 “그동안 반가운 소식이 참 많았다”며 체코 원전 수주부터 수출실적까지 성과부터 줄줄이 늘어놓았다. “IMF는 우리 성장률을 2.5%로 전망했는데 이는 미국 2.6%에 이어 주요 선진국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라고도 자랑했다. 한국은행이 22일 2.4%로 낮춘 전망치를 내놓은 사실은 쏙 뺐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 모양이다.
물론 대통령은 “이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체감 민생이 기대만큼 빨리 나아지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장바구니 물가가 여전히 높다며 할인 지원, 비축물량 방출, 할당관세 및 대체품목 수입 등을 통해 공급을 충분히 확대하겠다는 대책도 밝혔다.
● 말로만 개혁…실행능력은 있는가
그런데 어쩌랴. 그 말씀은 5월 기자회견 때 했던 답변과 똑같은 것을. “장바구니 물가는 사실 큰 돈 안 써도 한 몇 백억 정도만 투입해서 할인 지원하고 수입품에 대해 할당관세를 잘 운용하면 잡을 수 있다”고 아주 쉽게 큰소리친 걸 윤 대통령은 기억 못한단 말인가(브리핑을 쓴 참모도 잊었다면 큰 문제다). “수입원가를 낮추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서 좀 더 싼 식자재‧식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범 세계적인 루트와 시장을 조사하고 있다”고 5월에 이미 대통령은시험 답안을 외우듯 답했다.
21일 서울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오이가 개당 1000원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7월 생산자물가지수에 따르면 전월 대비 오이는 98.8%, 상추는 171.4% 올랐다. 동아일보DB
이번 브리핑에선 한발짝 나가긴 했다. “보다 구조적으로는, 온라인 도매시장 활성화 등을 통해 유통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도 개발해 나가겠다”고 했다. 구조적 개혁을 간절히 바라지만, 될까 싶다. 그래서 걱정스러운 것이다. 구중궁궐 국민과 동떨어져 사는 대통령이, 손 안 대고 코 푼 의대 증원 말고, 정말 정부가 나서야 가능한 ‘본질적 의료개혁’을 할 수 있을지.
● 바스티유가 무너진 밤 루이16세 “아무 일도 없었다”
개혁을 멈출 수 없다는 윤 대통령에 동의한다.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윤 대통령을 응원한다. 그러나 “국민들께서 강력하게 지지해주시면 저는 비상진료체계가 의사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데는 박수치기 어렵다. 대통령은 지금 비상진료체제가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했으나 현실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왕 루이 16세는 숲에서 사냥을 하고 나서 피곤해진 몸과 식후 졸음을 참으며 베르사이유 궁전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곤 작은 일기장에 깃털 펜으로 이렇게 썼다. “아무 일도 없었다.”
김순덕 칼럼니스트·고문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