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 윈프리. AP
그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특정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했거나, 전당대회에까지 참석한 쟁쟁한 스타들의 면면이다. 할리우드를 고스란히 옮겨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선 때마다 유권자 역시 ‘이번 대선에서는 어떤 톱스타가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에 관심을 가진다.
미국에서 유명 연예인이 직업 정치인 못지않게 자신의 정치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문화가 생긴 건 1950년대 미국 사회를 휩쓴 반공운동 ‘매카시즘’에 대한 반발 성격이 크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조지프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은 “문화계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며 진보 성향의 배우, 감독, 작가들을 대거 퇴출시키는 작업을 주도했다. 이에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서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내부 고발에 앞장서는 ‘마녀사냥’이 횡행하기도 했다.
이제 미 대선과 ‘스타’는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역대 대선에서 어떤 스타가 어떤 후보를 지지했고, 스타의 지지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살펴본다.
● 시나트라, 민주-공화 후보 모두 지지
역사 전문 방송 히스토리채널에 따르면 미 연예인 중 처음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한 사람은 1920년 대선 당시 배우 겸 가수 앨 존슨이다. 1927년 개봉한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의 주인공인 그는 공화당 소속의 워런 하딩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당시 그는 동료 배우를 모아 직접 작곡한 노래 ‘하딩, 당신은 우리를 위한 사람(Harding, You‘re the Man for Us)’이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 노래를 부르며 하딩 전 대통령의 고향인 오하이오주를 누볐다.
역시 배우 겸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는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으로 모두 활동하며 양당의 주요 대선 후보를 적극 지지한 특이한 경력을 보유했다. 이탈리아계로 젊은 시절 민주당원이었던 그는 민주당 소속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전무후무한 4선에 도전하던 1944년 대선 당시 수 차례 지지 연설을 했다. 또한 그는 1960년 대선 때 역시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위한 모금 행사를 주도했다. 그는 케네디 전 대통령과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였다.
시나트라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가 된 1980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공화당 전당대회 때도 참석했다. 그는 당시 “오랜 친구인 레이건의 열혈 팬이었다”며 “더 이상 민주당의 각종 자유주의적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그해 대선에서 승리했다.
1939년작 ‘오즈의 마법사’의 주연을 맡아 ‘무지개 넘어(Over the Rainbow)’란 명곡을 부른 주디 갈런드 역시 1960년 대선 때 케네디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전당대회에 등장했다. 케네디 전 대통령에게 전화로 ‘무지개 넘어’를 불러줄 만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 이스트우드는 ‘빈 의자’로 오바마 비판
클린트 이스트우드. AP
‘황야의 무법자’로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민주당 지지 인사가 대부분인 할리우드에서 드물게 공화당을 지지해 온 인사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 등장해 밋 롬니 당시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연단 위에 ‘빈 의자’를 가져다 놓는 퍼포먼스로 큰 주목을 받았다. 또 연설을 통해 오바마 1기 행정부의 성과가 ‘빈 의자’처럼 아무것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자신을 비판하는 퍼포먼스에도 “나는 이스트우드의 광팬”이라고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 스트립-위버 “힐러리” vs 보이트와 키드 록은 “트럼프”
2016년 민주당 소속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는 메릴 스트립, 시고니 위버 등 유명 여배우들이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전당대회에 총출동했다. 가수 케이티 페리와 레니 크래비츠, 농구 선수 카림 압둘자바 등도 대회장에 나타났다. 당시 비욘세-제이Z 부부는 대선 사흘 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겟 아웃 더 보트(Get out the vote)’ 투표 독려 공연 무대에 클린턴 후보와 같이 등장했다.
반면 최근 내한한 흑인 래퍼 카녜이 웨스트는 2016년 대선 때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를 지지했다. 당시 대부분의 연예인이 일방적으로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해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 후보는 승리 직후 웨스트를 자신의 뉴욕 사저 트럼프타워에서 만났다. 2018년에는 워싱턴 백악관 집무실로도 초청했다.
올해 대선에서는 민주당 전당대회의 셋째 날인 21일 연사로 등장했던 ‘토크쇼 여제’ 오프라 윈프리가 많은 관심을 모았다. 롱고리아는 22일 연사로 나섰고 위버 등도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 겸 부통령을 지지하고 있다.
공화당은 트럼프 후보와 과거부터 친분이 많은 가수 키드 록과 린 그린우드, 프로레슬러 헐크 호건 등을 전당대회장에 등장시켰다. 특히 키드록은 당시 공연을 하며 “싸우자(fight)”고 외쳐 큰 호응을 얻었다. ‘싸우자’는 전당대회 직전 유세 현장에서 피격을 당했던 트럼프 후보가 다시 일어서며 외쳤던 말로 공화당원들 사이에선 이번 대선의 주요 구호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할리우드의 원로 배우이며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진 존 보이트도 공화당 지지자로 유명하다. 그는 2016년 대선 때부터 트럼프 후보를 적극 지지해 왔다. 2016년과 2020년 공화당 전당대회 때는 영상 연설로 트럼프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올 4월에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정의를 바로 세우고 우리 나라를 망치는 짐승들을 제압할 것”이라고 밝혔다.
● 스타 지지, 모금-청년층 유권자에게 효과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뉴시스
특히 후원금 모금에서 스타들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윈프리는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둔 2007년 9월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 자택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을 위한 모금 행사를 열었다. 당시 300만 달러(약 40억 원)가 모였고 오바마 전 대통령이 클린턴 전 장관을 이기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 연예인의 지지 선언은 청년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 미 선거 당국에 따르면 2018년 중간선거 당시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권자 등록을 촉구한 지 1주일 만에 18~24세 유권자 19만 명 이상이 등록했다. 2016년 대선 때 18~24세 유권자가 8만8000명 등록한 것의 2배 이상이다. 2019년 팝가수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 투어장에 설치된 유권자 등록 부스를 통해 등록한 사람 수는 3만3000명이 넘는다.
미국은 50개 주마다 각각 정한 마감일까지 유권자 등록을 해야 선거 당일 투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거 때마다 유권자 등록 기간을 놓쳐 투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수백만 명에 이른다.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우선 유권자 등록부터 하라”고 호소하는 이유다.
● 정치 양극화로 최근 지지 표명 ‘신중’
다만 최근 미 정치의 양극화가 가속화하면서 스타의 특정 후보 공개 지지 움직임도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일랜드계와 흑인 혼혈로 중동과 무관한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는 지난해 12월 조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 초청에 응했다가 반(反)이스라엘 세력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친(親)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는 이들은 캐리에게도 “집단학살 동조자”라는 비난 댓글을 퍼부었다.
2020년 대선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했던 테일러 스위프트 역시 올해 대선에서는 아직 해리스 후보를 공개 지지하지 않고 있다. 역시 바이든 행정부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비판적인 젊은 팬들을 의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선 후보 측도 조심스럽다. 클린턴 전 장관은 2016년 대선 당시 유명인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지만 대선에서 패했다. 일각에선 중산층 또는 서민 유권자에겐 할리우드 스타와 대통령 부인 출신인 클린턴 전 장관 모두 ‘너무 먼 당신’이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당시 트럼프 후보는 백인 노동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민주당 또한 이번 대선에서는 과거보다 조심스럽게 ‘스타 마케팅’을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스타’ 대신 ‘SNS 인플루언서’ 선호
이에 따라 최근 미 정계에서는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를 대선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전당대회 때 틱톡,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200여 명을 초대해 촬영을 적극 지원했다. 전용 공간을 마련해줬고 모든 행사에 대한 무제한 접근을 허용했다.
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을 이용해 영화제에서나 볼 법한 ‘파란 카펫’을 깔았고 요트 파티도 열어줬다. AFP통신은 민주당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은 크리에이터들이 만든 틱톡 영상 속 전당대회는 ‘정당 행사’가 아닌 ‘축제’처럼 느껴졌다고 전했다.
우루과이계 시사 틱토커 카를로스 에두아르도 에스피나, 낙태권 활동가 데자 폭스 등 크리에이터 5명은 해리스 후보의 지지 연설자로도 나섰다. 민주당 또한 “연설자 5명의 소셜미디어 합계 추종자 수만 2400만 명이 넘는다”고 이들을 대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엘라 엠호프(맨 오른쪽). AP 뉴시스
이 드레스는 인스타그램 및 틱톡 추종자 수가 약 600만 명인 일본계 미국인 디자이너 조 안도히르시가 만들었다. 엘라와 안도히르시는 드레스 제작 과정이 담긴 쇼츠 영상 또한 여러 개 올려 젊은층의 호응을 얻었다. 패션지 인스타일은 가장 인기 있는 Z세대 디자이너와 손잡은 엘라의 선택이 젊은 유권자에게 좋은 평가를 얻을 것으로 내다봤다.
정치권과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의 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젊은 유권자들이 특정 인플루언서의 제안과 조언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20일 여론조사회사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18~29세 유권자의 48%가 “정치 의제를 따라잡기 위해 틱톡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50세 이상 유권자에서는 이 비율이 20%대 초반에 그쳤다. 또 18~29세의 45%가 “틱톡이 민주주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역시 다른 연령대에 비해 크게 높았다. 신문, 방송 등 전통 미디어를 보지 않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젊은 유권자를 공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소셜미디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이청아 기자 clearlee@donga.com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