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갭(GAP)을 아시나요. 꽤나 역사가 깊은(1969년 설립) 미국 패션 브랜드이죠. 아마 이제 중년이 된 X세대라면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GAP’ 세글자가 큼지막하게 가슴팍에 새겨져 있는 후드티 한 벌쯤은 옷장에 있었을 법합니다.
왜 추억의 브랜드 이야기를 꺼내냐고요? 망해가는 줄로 알았던 갭이 부활의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이죠. 최근 1년 주가 상승률은 무려 96%. 추락했던 실적도 눈에 띄게 반등 중입니다. 한물간 소비재 브랜드가 다시 힙하게 되살아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요. 오늘은 갭의 반전 스토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지루해진 1990년대 미국 국민 브랜드, 갭이 다시 돌아올까. 갭 홈페이지
갭을 입는다는 건 ‘남과 똑같은 옷을 입으면서도 멋지다’는 쿨함의 표현이었죠. 1992년 보그 100주년 기념호 표지를 채운 건 갭의 흰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슈퍼모델이었습니다. 199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배우 샤론 스톤은 26달러짜리 갭의 검은색 반팔 터틀넥을 입었고요. 갭 광고 출연은 유명함의 상징이 됐고, 광고에 쓰인 노래는 단숨에 히트곡이 됐습니다. 그 시절 갭은 패션인 동시에 문화 브랜드였습니다. 1992년 30억 달러였던 갭 그룹(Gap Inc.) 매출은 2000년 137억 달러로 수직상승했습니다. 같은 기간 5달러 안팎이던 주가는 2000년 2월 52.88달러를 찍었죠.
1990년대에 나온 갭의 광고 캠페인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1993년 ‘Who Wore Khakis’. 앤디 워홀, 제임스 딘,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을 등장시켜 캐주얼한 면바지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이후 20년 동안 갭 그룹은 리더십의 대혼란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새 CEO가 선임됐다 몇 년 만에 잘리기를 반복했죠. 전직 월트 디즈니 임원(폴 프레슬러), 캐나다 약국체인 책임자(글렌 머피), 경영 컨설턴트 출신(아트 펙),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 관리 전문가(소니아 신갈)까지. 4명 모두 공통적으로 패션이나 창의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데이터 분석’을 도입해 시장을 예측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려고 애썼죠. 하지만 패션 트렌드라는 게 그렇게 숫자로 딱딱 나올 리 없습니다. 리더도 명확한 비전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브랜드는 오락가락합니다. 어느 해엔 패스트패션과 경쟁하기 위해 저렴한 옷을 판매하다가, 그다음 해엔 수백달러짜리 가죽재킷을 파는 식이었죠. 점점 더 갭이 무엇을 대표하는 브랜드인지 정체성은 모호해지기만 합니다. 그 결과 이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가끔 엄청나게 할인하는 스웨터를 살 수 있는 그런 브랜드쯤으로 여겨지게 됐죠.
갭이 칸예 웨스트와의 협업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칸예가 갭을 드디어 구할 것처럼 시장은 환호했다. 하지만 신제품 출시는 심각하게 지연됐고, 2년 만에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사진은 ‘이지 갭’이 당시 내놨던 후드티.
갭의 지난 1년 주가 흐름. 한때 10달러 아래에 머물렀던 주가는 리처드 딕슨이 CEO로 온 뒤 개선된 실적을 기록하면서 서서히 회복 중이다. 다만 여전히 과거 2000년 최고점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구글 금융
“사람들은 내가 이직했을 때 ‘미쳤어’라고 생각했어요.” 딕슨 말대로 그는 당시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2014년 매출이 급락하던 마텔로 다시 돌아와 바비 브랜드의 변혁을 이끈 장본인이었고요. 그가 오랫동안 꿈꿨던 영화 ‘바비’가 드디어 성공적으로 개봉한 직후였죠. 전 세계가 ‘바비의 마법’에 주목하던 때, 그는 침몰하던 갭에 올라탑니다.
2023년 여름 개봉된 영화 ‘바비’는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 기록됐다. 바비가 장난감에 그치지 않고 패션과 영화로까지 확장하는 건 딕슨이 세운 브랜드 재창조 계획이기도 했다.
보통 소매브랜드는 ‘우리는 이런 멋진 브랜드’라고 정한 뒤, 일방적으로 이를 떠들기 바쁘죠. 하지만 그는 글로벌 조사를 통해 소녀와 그 부모들이 바비의 어떤 점을 싫어하는지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피드백은 바비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닮지 않았다는 겁니다. 소비자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인형의 얼굴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형의 피부톤, 머리 색깔과 질감, 키, 다리 길이, 체형 등. 모든 걸 재설계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26가지 민족의 바비와 함께 휠체어를 타거나 의족을 착용한 바비, 수의사, 로봇공학자 등 각종 직업의 바비도 등장했죠. ‘놀이로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한다’라는 브랜드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다시 돌아간 겁니다.
그가 갭에 와서 한 작업도 비슷합니다. 먼저 브랜드의 ‘목적’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마텔에서 던졌던 그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왜 우리는 여기 있는가?” “처음에 우리를 위대하게 만든 건 무엇인가?”
그가 찾은 답은 ‘클래식’입니다. “사람들은 클래식을 위해 우리에게 옵니다. 면바지, 데님, 흰색 티셔츠. 이런 것을 특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놀라운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사람들과 함께요.”
딕슨이 CEO로 취임한 지는 이제 겨우 1년 남짓. 그동안 그는 이런 일을 했습니다.
갭 그룹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된 잭 포슨이 디자인한 갭의 셔츠 드레스. 158달러라는 다소 비싼 가격을 책정했지만 금세 완판됐다. 갭 홈페이지
-‘50% 할인’을 요란하게 알리던 배너를 홈페이지 저 구석으로 밀어냅니다. 할인에 의존하면서 갭은 점점 “실제로 무엇을 판매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객이 프로모션에 압도당하지 않고 제품에 끌리길” 원했습니다.
-이제 홈페이지에 접속한 고객이 가장 먼저 보는 건 할인 배너가 아닌 춤추는 모델들이 등장하는 감각적인 영상입니다. 올봄에는 린넨 바지와 셔츠, 이번 가을엔 헐렁한 데님룩이 메인 테마입니다. 영상의 중심엔 팝스타 타일라, 트로이 시반 같은 Z세대에 핫한 유명인을 내세웠습니다. 그는 “패션은 엔터테인먼트”라고 주장합니다.
-오프라인 매장에선 재고를 크게 줄입니다. 할인매장처럼 어수선해 보이지 않기 위해서죠. 매장에서 흘러나오던 졸린 음악은 이제 더 경쾌한 음악으로 바뀌었습니다.
-8월 22일 공식적으로 주식거래 기호(티커)를 ‘GPS’에서 ‘GAP’로 변경했습니다. 1976년 뉴욕증시에 상장한 뒤 48년 만이죠. 상징적이지만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신호입니다.
8월 22일 뉴욕거래소에서 티커 변경 행사를 하며 포즈를 취한 리처드 딕슨 CEO(오른쪽)과 잭 포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왼쪽). 뉴욕거래소 SNS
하지만 현재까지의 실적은 훨씬 더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냅니다. 그룹 매출은 하락세를 멈췄고 올 1분기엔 3%, 2분기엔 5% 성장했죠. “모든 소득계층에서 매출이 성장 중”이라고 딕슨 CEO는 설명하는데요. 2분기 순이익은 1년 전보다 거의 두 배로 증가했고, 회사 측은 최근 연간 이익 전망을 상향 조정했습니다. 1년 전만 해도 쳐다보지 않던 애널리스트들이 이제 투자등급을 상향 조정하거나, 목표가를 올려잡기 시작했죠. 어쩌면 ‘회복의 초기 단계’에 와있는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물론 갈 길은 멉니다. 업계에선 지난 20여년 동안 인내심 없이 CEO를 갈아치워 온 오너 일가(창업자의 아들)와 변혁을 동참하기엔 무기력한 갭의 조직 분위기를 걸림돌로 꼽죠. 무엇보다 위대한 순간이 지나가버린 한물간 브랜드를 되살리기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몸매 좋은 백인 10대를 위한 브랜드였던 아베크롬비는 이제 180도 달라졌다. 과거의 섹시 컨셉을 버리고 직장에 입고 갈 법한 깔끔한 룩을 추구한다. 아베크롬비 공식 SNS
신문사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올드한 브랜드를 되살리는 방법에 관심이 많습니다. 과연 낡은 것이 다시 힙해지는 건 가능한 일일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한때는 미국 문화 그 자체였던 패션 브랜드, 갭. 하지만 2000년 정점 이후 기업은 리더십 혼란에 빠지고 브랜드는 그 정체성을 잃어갔습니다.
-몰락하던 브랜드가 지난해 영입한 새 CEO는 리처드 딕슨. 쇠퇴한 아이콘 바비를 되살렸던 그 재능에 주목한 건데요. ‘무엇이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었나’라는 질문에서 그가 찾은 답은 ‘클래식’입니다.
-어수선한 홈페이지와 매장이 정리되고, 린넨과 데님을 앞세운 감각적인 광고 영상이 새로운 갭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아직 초기이지만 매출이 되살아나면서 희망이 보이려 하는데요. 아베크롬비만큼 극적인 반전을 기대해도 될까요.
*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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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