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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임수]송전망·데이터센터 막는 ‘지자체 님비’

입력 | 2024-09-03 23:15:00

정임수 논설위원



동해안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국도 7호선을 따라 위쪽에는 석탄화력발전소가, 아래쪽엔 원전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올봄부터 이곳 화력발전소들이 줄줄이 가동을 줄이거나 멈춰 섰다. 전기를 생산해도 수도권으로 실어 나를 송전망이 부족해서다. 동해안 지역의 전기 생산량은 최대 18GW인데 송전선로 용량은 11GW에 불과하다. 매년 신기록을 써내려가는 폭염과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확대로 수도권의 전력 수요는 치솟고 있지만 송전망이 부족해 지방에 발전소를 짓고도 놀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론 눈치 보느라 변전소 증설 막은 하남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전력은 당초 2019년 준공을 목표로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8GW 용량의 송전선로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강원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5년 넘게 지연된 데 이어 최근 환경단체들이 행정소송을 내면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 송전선로의 종점 역할을 하는 동서울변전소 증설을 두고 인허가권을 쥔 경기 하남시가 지난달 퇴짜를 놨다. 수도권 전력난 해소를 위한 국책사업이 수도권 지자체의 반대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하남시는 전자파가 주민 건강을 해칠 수 있고 의견 수렴 절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증설을 불허했다. 초고압 송전망에 대한 주민 불안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기우에 가깝다. 변전소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에서 측정된 전자파는 편의점 냉장고보다 낮고, 변전소를 증설하면서 설비를 실내로 옮기면 전자파가 55% 이상 줄어든다고 한다. 서울 시내에도 2km마다 하나씩 변전소가 있다. 이런데도 하남시가 주민을 설득하기는커녕 반대 여론에 편승해 송전망 건설에 제동을 건 것은 전형적인 님비(NIMBY) 행태다.

2008년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로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실력 행사에 나서면 지자체가 이들 눈치를 보며 인허가를 주저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서해안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경기 남부로 보내기 위한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는 주민 민원과 지자체의 공사 중지 명령 등으로 소송전이 벌어져 12년 넘게 준공이 늦춰졌다. 인천 송도 바이오클러스터에 전력을 공급할 송전선로 사업도 5년 넘게 지연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국내 발전설비가 55% 늘 때 송전망은 고작 9% 증가한 배경이다.


수도권 데이터센터 절반이 ‘지자체 암초’ 걸려


주민 반대와 지자체의 비협조로 몸살을 앓는 건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다. 경기 고양시는 덕이동 데이터센터의 착공 신고를 지난주 최종 반려했다.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가정용 전기밥솥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사업자가 소명했지만, 전자파 유해성을 앞세운 주민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비슷한 이유로 김포시는 3년 전 건축 허가를 내준 데이터센터에 대해 최근 착공을 불허했다. 수도권에서 인허가를 받은 데이터센터 33곳 중 절반 이상이 차질을 빚고 있다.

‘산업 혈관’에 해당하는 전력망과 AI 시대에 필수인 데이터센터 확충은 더는 늦출 수 없는 생존의 문제다. 이대로라면 각국이 뛰어든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물론이고 첨단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도 전력 공급이 안 돼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이 닥칠 수 있다. 국가 핵심 인프라 건설의 발목을 잡는 ‘님비 지자체’에 확실한 불이익을 줘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전력 수급의 미스매치와 전자파 포비아는 한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중앙정부가 직접 합리적 보상 방안을 마련해 주민 갈등을 중재하고, 지자체와 각 부처로 나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해 전력망 구축 속도를 높일 토대를 서둘러 갖춰야 한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