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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가 또박또박 건네는 위로[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입력 | 2024-09-05 22:57:00



동네 도서관에는 특별한 책상이 하나 있다. 달마다 사서가 좋은 책을 골라 책상에 올려두면 “‘필사’적 읽기”라는 참여형 프로그램이 이뤄진다. 오가는 사람들 누구나 책상에 앉아서 책을 필사할 수 있다. 노트 앞장에는 사서의 글씨가 적혀 있다. ‘날짜와 소감, 쪽수를 남겨주세요.’ 사서의 말에 응답하듯 필사가 시작된다. 앞사람이 필사를 마친 부분부터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문장을 필사하고, 자신의 소감을 덧붙이는 식으로 릴레이 필사가 이어진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진 몰라도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히 알려진 꽤 오래된 낭만적인 문화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도서관에 올 때마다 나는 이 책상을 지나치지 못한다. 노트를 펼친다. 작가의 문장이 사람들의 손과 손으로 옮겨져 마치 다른 버전의 책처럼 빽빽한 글씨로 담겨 있다. 칸을 지켜 동글동글 반듯하게 쓴 글씨, 수첩에 휘갈기듯 시원스럽게 써 내려간 글씨, ‘모두 행복하세요’ 다정한 인사를 덧붙인 정갈한 글씨까지. 정말 신기하다. 사람의 필체는 미묘하게 모두 달라서 글쓴이의 감정과 성품까지 그대로 느껴진다. 필사 노트를 넘길 때마다 좋은 사람을 만나본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까.

언젠가 붓펜으로 한시를 필사하고 그 아래 인생 조언을 남겨주었던, 어르신으로 짐작되는 일필휘지의 글씨를 잊지 못한다.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의기소침하지 마십시오. 경험과 정성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 나는 선 채로 감탄했다. 고요한 도서관을 둘러보았을 땐 공부하는 만학도들이 많았다. 누구일까. 어떻게 살아온 사람일까. 사람들은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조용하고 비밀스러웠다. 이상하기도 하지. 그래서 더 위안이 되었다.

필사 노트를 넘겨본 날에는 마주치는 낯선 이들이 평소보다 선량하고 다정하게 보인다.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을까. 오늘과 일상과 인생을 살아가는 속마음이 궁금해진다. 책상에 앉아 시간과 정성을 들여 종이에 문장을 옮겨 적는 사람들. 꼭 편지 쓰는 사람들과 닮았다. 책의 문장을 빌려 힘이 되는 격려와 위로 같은 것을 선뜻 건네고 가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손글씨를 적어 두는 사람이라면 마음 씀이 모나거나 고약할 리가 없다.

나도 가끔 필사 노트에 흔적을 남긴다. 손바닥으로 종이를 만져 보면 꾹꾹 눌러쓴 글씨 자국이 한데 겹쳐 지문처럼 느껴진다. 어느새 두툼해진 노트는 겹겹이 마음을 모아 만든 책처럼 보인다. 나는 조용히 바란다. 도서관 책상에 올려둔 작자 미상의 필사 노트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또 언젠가는 송경동 시인의 시 ‘삶이라는 도서관’을 긴 추신으로 적어둘 수 있기를.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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