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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가 만난 사람]“눈으로 소리를 보고 몸으로 진동 느끼며 바이올린 만듭니다”

입력 | 2024-09-05 23:18:00

청각장애 바이올린 제작자 신동준 씨
수백 대 뜯고 수리하며 제작법 독학…자기만의 방식으로 최적의 소리 체득
연주자-콩쿠르 참가자들 주문 줄이어
몸으로 듣는 법 가르쳐준 외할머니…“제 악기 소리 어디선가 듣고 계시죠?”




바이올린 제작자 신동준 씨가 바이올린 앞판을 귓가에 대고 손으로 두드리며 진동을 확인하고 있다. 청각장애를 가진 그는 귓가의 피부와 고막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최적의 소리를 찾아낸다. 경주=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신동준 씨(42)는 21년 차 바이올린 제작자다. 동준 씨는 어릴 때 청각장애를 갖게 돼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한다. 그 대신 그는 눈으로 소리를 보고, 피부로 진동을 느낀다.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 바이올린을 만든다. 음악 콩쿠르에 출전한 학생들은 물론이고 전문 연주자와 음대 교수들도 동준의 바이올린을 들고 무대에 오른다. 그 역시 2022년 세계 3대 현악기 제작 콩쿠르인 독일 미텐발트 콩쿠르에 나가 주목을 받았고, 2년 뒤 재도전을 준비 중이다. 보청기를 낀 바이올린 장인으로 살아온 그의 삶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지난달 EBS 국제다큐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됐다.》


그가 소리를 보고 느끼는 방법
2일 경북 경주시에 있는 동준 씨의 바이올린 공방에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실내 온도가 20도, 습도는 45도에 맞춰져 있었다. 나무 악기인 바이올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천장에는 그가 제작 중인 바이올린 4대와 비올라 1대가 걸려 있었다. 33㎡(약 10평)쯤 되는 공간을 가득 채운 5개의 작업대에는 자르고, 대패질하고, 계측하고, 칠하기 위한 각종 장비들이 펼쳐져 있었다. 목수와 재단사, 과학자의 작업실을 합쳐 놓은 듯했다.

“좋은 소리를 어떻게 분간하느냐”는 질문에 동준 씨는 유럽 발칸반도산 단풍나무 몇 토막을 가져왔다. 그는 기자의 귓가에 나무토막을 갖다 대더니 손가락으로 나무를 톡톡 두드렸다.

“진동이 느껴지세요?”

느껴지는 건 없었다. 동준은 나무토막을 자기 귓가로 가져가 나무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저는 귓가의 피부와 고막으로 진동을 느껴요. 이 나무처럼 귓가를 확 때리는 듯한 느낌이 나야 열린 나무예요. 안 느껴지면 닫힌 나무죠. 열린 나무로 만들어야 바이올린에서도 열린 소리가 나요.”

바이올린은 앞판과 뒤판이 볼록한 ‘아칭(arching)’ 구조로 돼 있다. 아칭을 잘 만드는 게 핵심이다. 부분별로 나무 두께가 다르기 때문에 섬세하게 작업해야 한다. 동준 씨는 앞판과 뒤판을 수천 번 두드리며 최적의 아칭이 나올 때까지 깎아낸다.

동준 씨는 “저는 소리를 이렇게 본다”며 작업실 구석으로 향했다. LP 턴테이블처럼 생긴 소리 테스트기가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 앞판을 테스트기에 올리고는 앞판 위에 현미가루를 흩뿌렸다. 스피커를 통해 ‘윙’ 하는 소리가 나오자 음파의 진동으로 현미가루가 여기저기서 튀어 올랐다. 그러곤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이뤄 양옆으로 펼쳐졌다. “지금처럼 가루들이 좌우로 3자 모양, 가운데로 일자 모양이 나와야 아칭이 제대로 잡힌 거예요.”

바이올린 앞판 위에 뿌린 현미가루가 소리 테스트기에서 나오는 진동에 의해 펼쳐진 모습. 좌우로 3자 모양, 가운데로 일자 모양이 나타나야 앞판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동준 씨는 말한다.



“바이올린 제작은 최고의 예술”
동준 씨는 그림을 그리며 중고교 시절을 보낸 미대생이었다. 그러다 20대 초반 악기 제작으로 진로를 틀었다. 가족들은 “왜 굳이”라며 그를 말렸다고 한다. “그림은 전시를 하면 사람들이 한 번 보고 지나가잖아요. 저는 미술이 일회성 예술인 것 같아 회의감이 들었어요. 그러다 집 근처에 바이올린 수리점이 있었는데 거기 걸린 악기들을 볼 때마다 바이올린 제작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모양을 만들고, 색을 칠하고,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게다가 과학적이고….”

동준 씨는 수리점에 들어가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첫 3개월은 대패질만 시켰는데도 동준이 포기하지 않자 그곳의 수리 전문가가 노하우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동준은 이후 5년 넘게 바이올린 수백 대를 열고 뜯고 재조립하면서 다양한 제작 방식을 역으로 배워갔다. 잘 만든 것과 못 만든 것을 나란히 놓고 손으로 두드려가며 좋은 소리를 만드는 최적의 진동을 체득했다. 동준은 이후 몇 년간 악기 회사에 다니다가 2012년 개인 공방을 차렸다. 그때부터 주 7일, 오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바이올린을 만드는 일상을 12년째 이어오고 있다.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조명을 하나만 켜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동준 씨. 경주=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너무 일만 하는 것 아닌가?

“제작에 몰입하면 시간이 금방 가버린다. 한 대를 완성하기까지 공정이 500개 정도 되는데 계획대로 진도를 빼려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얼마나 만드나?

“1년에 12대 정도 만든다. 바이올린 하나를 만드는 데 6개월~1년가량 소요된다. 중간에 건조 시간이 있어서 여러 대를 동시에 진행한다. 원하는 진동이 안 느껴지면 버리고 다시 만들어야 해 늘 시간이 부족하다.”

―늘 신경이 예민할 것 같다.

“소리를 느껴야 하는 것도 있고, 바이올린이 과학적인 악기여서 정확하게 비율을 맞춰야 해서 감각이 곤두선다. 예전엔 매운 음식을 좋아했는데 요즘은 너무 맵게 느껴져 못 먹는다.”

―얼굴과 손에 상처가 많은데….

“칠 작업용 물감을 만들 때 에탄올을 쓰는데 욕실에서 작업하다가 알코올에 취해 넘어지면서 유리를 들이받아 얼굴을 베었다. 손도 많이 베이는데 저보다는 나무가 안 다치는 게 중요하다. 손은 꿰매면 되지만 나무는 한번 잘못되면 버려야 하니까.”

―이 일이 그렇게 소중한가?

“바이올린을 만드는 건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지금은 나무토막이지만 바이올린으로 만들어지면 100년 넘게 살아가니까. 저는 쓰임이 있는 악기를 만들고 싶다. 100년 넘게 쓰일 악기를 만드는 데 6개월, 1년을 바치는 건 전혀 수고로운 일이 아니다.”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은 안 됐나?

“되니까,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다. 베토벤도 귀가 안 들려서 피아노에 발을 대고 건반 진동을 느끼면서 작곡을 했다. 그게 큰 용기를 줬다. 소리를 꼭 귀로만 들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바이올린 제작 작업 중인 동준 씨. 경주=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연주자와 제작자는 빛과 그림자 관계
동준 씨의 바이올린이 연주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탈리아나 미국에 있는 유수의 제작학교 출신들 사이에서 그는 수리 장인의 도움과 독학으로 배운 무명 제작자였다. 동준 씨는 만든 악기들을 가지고 전국을 다니며 연주자들을 만났다. 연주자가 악기에 관심을 보이면 연주 운지법을 세밀하게 그려온 뒤 바이올린을 완성해 갖다 줬다.

“연주 소리는 속일 수가 없어요.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라면 언젠간 연주자와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의 첫 고객은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예고생이었다. 이어 콩쿠르 지망생들로 넓어졌고, 전문 연주가와 음대 교수들도 그의 바이올린을 켠다. 동준 씨는 2021년 전국의 현악기 장인들이 모이는 서리풀 악기제작 전시회에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출품해 연주자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동준 씨는 악기를 연주자에게 넘긴 뒤에도 한동안 그의 공연장을 찾는다. 수천 번 바이올린을 두드리고 튕기며 느꼈던 소리와 진동이 제대로 울려 퍼지는지 멀찍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고 한다. 소리가 깊을수록 진동은 멀리까지 선명하게 전달된다.

“연주자와 악기 제작자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예요. 무대에서 연주자가 박수를 받을 때 공연장 한 귀퉁이에 제작자가 있습니다. 연주자에게서 “오늘 연주가 편안하고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제야 안도감이 들죠.”

제작 중인 비올라를 들고 있는 동준 씨. 경주=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소리를 몸으로 가르쳐준 외할머니
동준 씨는 한 살 때 열병을 앓다가 주사제의 부작용으로 청력을 잃었다. 다른 가족들은 아기의 성장이 더딘 줄로 여겼지만 손자를 눈여겨본 외할머니는 동준 씨의 청각장애를 가장 먼저 알아봤다. 외할머니는 밖에서 일을 하는 딸을 대신해 동준 씨를 돌보며 구화법을 가르치는 특수학교에 보냈다. 구화법은 입 모양으로 말을 이해하고 발성 연습을 통해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교육법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소리를 몸으로 배웠어요. 외할머니는 제가 학교에서 배운 걸 하루도 안 빼놓고 복습을 시키셨어요. 할머니 목에 제 손을 대고, 할머니는 제 목에 손을 대고 대화하면서 울림과 진동을 느꼈어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할 때도 손에 느껴지는 진동이 다 다르거든요. 제가 힘들다고 도망 다녀도 외할머니는 저를 끝까지 놓지 않으셨어요. 동요도 할머니 따라 하면서 배워서 불렀는데 특수학교 선생님들이 신기해하셨어요.”

동준 씨는 외할머니가 그를 키울 때 썼던 육아일기를 간직하고 있다. 외할머니는 공책에 형형색색의 색연필로 입 모양을 하나하나 그렸고, 손자가 기억할 수 있도록 동요 가사에 나오는 동물이나 물건들도 그림으로 그렸다.

<1985년 9. 4>
아침에 책 읽어줄 것, 음악 틀어줄 것.
발성훈련. 모음의 입 모양을 하나하나 그려서. 손으로도 함.
눈여겨보기(똑같은 모양 찾기) 얼른 보여주고 찾게 하기.

<1985년 9. 9>
탬버린, 피리, 실로폰을 동준이 못 보게 하고, 하나씩 불고 치며 알아맞히게 함.
피리 소리 못 맞히고 실로폰 소리는 맞혔다. 동준이 일어서! 공부 다 했다. 인사하자.
동준이가 그림 장려상을 받았다. 생각 밖이다.

동준 씨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외할머니는 손자가 만든 바이올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노년에 치매를 앓았던 외할머니는 동준 씨를 자주 불러 냉장고에 있는 과일이 동날 때까지 깎아줬고, 동준 씨는 배가 불러도 군말 없이 과일을 먹어치우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바이올린 제작 작업 중인 동준 씨. 경주=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외할머니는 제게 ‘평범하게 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남들 사는 것처럼 살라고. 보청기를 끼고 바이올린을 만드는 제 일상도 어쩌면 평범한 삶 아닐까요. 다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동준 씨는 외할머니 산소에 갈 때면 들려드리는 곡이라면서 ‘슈피겔 임 슈피겔(거울 속의 거울)’이란 연주 녹음 곡을 기자에게 틀어줬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와 함께 맑고 깊은 바이올린 선율이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동준 씨가 만든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저는 좋은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만들고 싶어요. 어디선가 외할머니가 듣고 계실 수도 있잖아요. 가끔은 여쭤보고도 싶어요. 할머니, 이 소리 듣고 계시죠? 마음이 좀 평안해지세요?”


경주=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