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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선 미로에 갇힌 ‘韓기업 104조 투자’

입력 | 2024-09-06 03:00:00

[2024 미국 대선 D-60]
반도체 보조금 등 지속여부 안갯속… 정책 불확실성 커져 투자 ‘일단멈춤’
해리스-트럼프, US스틸 매각 반대… 동맹보다 경제 표심 ‘美우선주의’





11월 5일 미국 대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가 4일(현지 시간) 뉴햄프셔주 노스햄프턴에서 유세를 갖고 “부유층과 대기업이 공정한 몫을 지불하도록 자본이득 세율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노스햄프턴=AP 뉴시스

미일 ‘철강동맹’으로 불렸던 20조 원 규모 일본제철의 미국 US스틸 인수가 불발될 위기에 놓였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뿐 아니라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대선 후보도 “US스틸은 미국인이 소유해야 한다”며 미 우선주의 기조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최우방국인 일본조차 미 우선주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는 상징적 사례로 꼽힌다. 5일 재계 관계자는 “박빙의 미 대선 승부에서 누가 당선돼도 ‘아메리칸 퍼스트’ 기조는 강화될 것이라는 의미”라며 “미 자국 경제 논리와 표심 앞에 동맹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돼 한국 기업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는 같은 날 최대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해리스가 집권하면 역사상 최악의 증세가 이뤄져 부자와 다국적기업이 미국을 떠나고 대공황이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리스버그=AP 뉴시스

미 양당 대선 후보들이 모두 자국 우선주의 노선을 드러내면서 조 바이든 행정부하에서 대미 투자를 늘린 한국 산업계도 영향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 동아일보가 바이든 정부 이래 칩스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른 국내 4대 그룹 대미(對美) 투자 현황을 분석한 결과 현재까지 밝혀진 총 투자 금액은 104조20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선 후 차기 행정부 경제정책의 불확실성 확대와 미 경제 둔화가 겹쳐 이 같은 4대 그룹의 ‘투자 보따리’도 시험대에 올랐다. 조용히 투자를 보류하거나 지연시키는 사례도 늘고 있다.

삼성전자가 250억 달러(약 33조6000억 원)를 투자해 2022년 상반기(1∼6월) 착공한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은 당초 1공장이 올 하반기(7∼12월)에 가동한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현지 공사비 증가와 보조금 지급 문제 등에 따라 양산 시점을 2026년 이후로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미 정부는 칩스법에 따른 최대 9조 원의 보조금을 삼성에 지급한다고 올해 4월 발표했지만 실제 지급은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IRA 세액공제 수혜와 현지 자동차 회사 합작 등을 계기로 바이든 행정부 시기 대거 현지에 진출했던 배터리 업계도 우려하기는 마찬가지다. 새 행정부에서도 IRA에 따른 지원 기조가 이어질 수 있을지 불확실성이 커진 데다 배터리 시장 성장 정체도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SK온 美배터리공장 가동 연기, LG엔솔 공사 미뤄


[美대선 불확실성 커진 韓기업]
미로에 갇힌 對美투자
“日, 범정부 차원 액션플랜 구축
한국도 정부-업계 적극 협력 필요”

미국에 진출한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속속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섰다. SK온은 포드와 합작해 켄터키주에 짓고 있는 배터리 2공장의 가동 시점을 연기한다고 지난해 밝혔다. LG에너지솔루션도 올 6월 3조2000억 원을 투입한 애리조나주 ESS 배터리 공장 건설을 착공 두 달 만에 중단한 바 있다.

한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에 투자한 다른 글로벌 기업들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정책 일관성 우려에 투자를 지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칩스법 시행 첫해인 2022년에 발표된 주요 제조업 투자 프로젝트 총 2279억 달러 가운데 40%가량인 840억 달러 규모의 투자가 최소 두 달에서 최대 수년간 연기됐거나 아예 무기한 중단된 상태다.

미국의 경제 둔화와 자국 우선주의 영합이 맞물리며 향후 동맹국이라 하더라도 해외 기업에 대한 지원에 저항 기류가 커질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른바 ‘보조금 청구서’가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지 노동조합과 사회단체 등 여론의 압박이 국내 기업엔 변수다.

실제로 10월 준공을 앞두고 있던 현대자동차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은 공장 용수 사용이 지역 상수도에 미치는 영향을 규제 당국이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환경보호단체의 주장으로 미국 당국의 환경 허가 재검토를 받게 됐다. 조지아주는 미국 내에서도 주요 경합주 중 한 곳으로, 술렁이는 민심에 당국이 한발 물러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차 공장은 민주당 표심을 쥐고 있는 전미자동차노조(UAW)로부터 가입 압력도 받고 있다.

불확실성 확대에 4대 그룹은 올 상반기(1∼6월) 대미(對美) 대관 비용을 전년 동기 대비 10% 늘리는 등 대선 향방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산업계를 넘어 유관 부처와 정·재계 합동 대응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박효민 법무법인 세종 해외규제팀 변호사는 “일본은 범정부 차원에서 경제 안보 액션플랜을 정비하고 민관 대화를 진행하는 등 시스템을 구축해 대응하고 있다. 우리도 부처와 산업계가 밀접하게 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실행하기 위해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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