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창(南窓)으로 향한 서탁(書卓)이 차고 투명하고 푸릅니다. 새삼스럽게 눈앞의 가을에 눈을 옮깁니다.’ 창밖으로 여러분이 보입니다. ‘푸른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메밀꽃 피었다
평창 효석달빛언덕에 복원한 평양 푸른 집.
들어와 보십시오. 침실, 거실, 서재, 부엌까지 제 생애 마지막 6년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서랍에는 버터와 커피 내리는 기구가 있고 축음기에서는 쇼팽이 흘러나옵니다. 무릎에 앉힌 큰아이 손을 잡고 풍금을 쳐봅니다.
거실 벽에는 프랑스 배우 다니엘 다리외 사진을 걸었습니다. 미국 배우 비비언 리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더군요.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동료 4명과 ‘조선 시나리오 라이터 협회’를 결성할 정도로 영화를 사랑했습니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시나리오 ‘출범시대(出帆時代)’를 연재했죠.
평양 푸른 집 거실. 꽃병에 꽃이 항상 꽂혀 있다.
좁은 복도를 지나 하얀 문을 열면 모던한 전시실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하면 바깥 커다란 ‘달’(그렇습니다. 달이 빠지면 안 됩니다)에 그 마음이 글자로 나타납니다. 자갈로 채운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근대문학체험관과 복원한 생가가 나옵니다.
나귀 앞 바람개비 동산에 서서 푸른 집 뒤 언덕을 봐주세요. 제 유택(幽宅)입니다. 경기 파주에서 옮겨 왔습니다. 커피 한잔 들고 올라오시죠. 커피는 겨울에 실내 ‘불멍’이 가능한 북카페에 있습니다.
천천히 5분 걸으면 이효석문학관에 닿습니다. 제 육필 원고와 각종 이력 자료, 동시대 문인들 책과 연구서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메밀꽃 필 무렵 전문을 벽에 새겨놓기도 했네요.
카페 ‘동(Don)’도 있습니다. 소설 속 ‘동이’는 아닙니다. 1931년 서울을 떠나 함경북도 경성농업학교에 근무할 때 인근 마을 나남(羅南)에 있던 커피집입니다. 그 집 커피 맛에 홀려 일요일마다 10리 길을 걸었습니다. 동 옆 잔디밭에 책상에 앉아 글 쓰는 제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습니다. 포토존입니다.
지난해 평창효석문화제 광경. 꽃이 하얗게 핀 메밀밭으로 나귀를 끌고 간다. ‘메밀꽃 필 무렵’ 한 장면을 재현했다.
영월 청령포 전경.
춘원(春園)은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6월 28일 한양을 떠난 영월 유배 행렬이 ‘7월 초승달 빛 두견성(杜鵑聲) 슬피 들릴 때’ 이르렀다 했네. 예까지 한 달 길이었다는 얘기도 있네. 그대도 아마 몇 시간은 족히 걸렸을 걸세.
야트막한 자갈길을 오르면 이내 송림. 그 안에 어소(御所)가 있네. 정면 4칸 기와집으로 2000년에 문화재청에서 복원했지. 논쟁이 있었네. 노산군(魯山君)으로 격이 낮아진 상왕(上王)에게 기와집 지어줄 여유가 없었다는 주장과 땅을 파보니 기와 조각 등이 나왔다는 의견이 맞섰지. 단종애사 등은 ‘나뭇조각 지붕에 판자를 잇댄 집’이었다고 하니 너와집이었을 수도 있겠네. 그전까지는 어소가 있었음을 알리는 비석 ‘端廟在本府時遺址碑(단묘재본부시유지비·1763년 · 영조 39년)’와 정조 때 지은 비각(碑閣)만 있었네.
청령포 단종 어소를 향해 허리 숙여 읍하는 소나무.
본디 지명은 청랭포(淸冷浦)였네. 1726년 영월부사(府使) 윤양래가 랭(冷)의 부수 ‘두 이(冫)’보다 조화로운 숫자 3(氵·삼 수)이 들어간 ‘령(泠)’이 낫다고 본 것이라지.
여기서 승용차로 4분 정도면 내가 묻힌 영월 장릉(莊陵)에 이르네. 그해 큰비로 어소가 잠기자 관아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고 10월 사사(賜死)됐지. 동강에 던져져 아무도 수습할 엄두를 못 내던 시신을 호장(戶長) 엄흥도가 야음에 건져내 암매장했다고 전하네. 1516년 중종 11년에야 이리로 옮겨 묘를 꾸몄고. 장릉으로 불린 건 복위된 1698년 숙종 때일세.
조선 왕릉 44기 가운데 장릉은 다른 능과 사뭇 다르다네. 조성 기준인 도성 10리(약 4km) 밖, 100리(약 40km) 안에 있지 않지. 봉분도 왕릉 중 가장 높은 해발 270m에 있네. 왕릉 입구 홍살문에서 제향(祭享) 올리는 정자각(丁字閣) 그리고 봉분까지 대개 직선상에 있지만, 오른쪽으로 90도 굽었다네. 봉분 주변 병풍석, 난간석도 없으며 돌로 된 호랑이, 양, 말도 4필씩이 아니라 2필씩만 있네. 문관석(文官石)은 있지만 무관석(武官石)은 없어. 무고한 피를 흘린 신하 268위의 절의(節義)를 기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네.
내 무덤이 영월 사람에게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서나 집에 우환이 있을 때들 와서 사배(四拜)하네. 부임하고도 찾아보지 않은 기관장이 횡액을 만났다는 풍문도 들리네. 정월 초하루에는 참배객으로 인산인해. 6·25전쟁 당시 국군과 인민군이 “장릉 쪽으로 총을 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는데, 잘 찾아보면 탄흔이 있다네.
과인을 찾아오는 길은 다크투어(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여행)일지 모르겠네.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네들 아끼는 마음 변치 않음세. 그것만 알아준다면 족하네.(도움말: 김원식 이갑순 문화해설사)
● 평창 육백마지기와 영월 요선암 돌개구멍
강원 평창군 청옥산 육백마지기 전경.
강원 영월군 무릉도원면 주천강 요선암 돌개구멍. 중생대 쥐라기 화강암들이 1억 년 넘게 물살의 소용돌이에 깎여 움푹 파인 흔적이다. GNC21 제공
평창·영월=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