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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의 ‘마력’… 참여자를 매혹시켜 순응자로 만든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4-09-08 22:57:00

〈89〉 행렬 구경과 동참의 신비
임금 행차 등 권력자 행렬
예식의 힘에 사로잡히면… 구경꾼 마음에는 정화작용
질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 행렬 일부로 동참 때 더 고양감



권력자의 행렬을 그린 그림. 네덜란드 화가 소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행렬’. 사진 출처 위키데이터


《내 작은 소원 하나가 이번 여름에 이루어졌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대성당이 성모승천일을 맞아 유서 깊은 행렬 의식을 재개했기에, 성당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성모상을 지고 시내를 도는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지나가던 여행객으로서 구경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마침내 그 행렬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유럽의 가톨릭 행렬의식에 대한 내 환상은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1953년)에서 시작되었다. 관계의 위기에 봉착한 두 남녀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이탈리아 여행을 온다. 그러나 여행 중에 주고받는 것은 상대를 찌르는 말뿐, 관계는 좀처럼 회복될 줄 모른다. 이제 결국 파국만이 남은 것인가. 공허한 마음을 안고 고고학 박물관, 지하묘지, 폼페이의 유적을 떠도는 여주인공의 동선을 카메라가 따라간다. 마침내 영화의 결말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별로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남녀는 기적적으로 사랑을 회복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의 사랑이 다시 피어오른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영화 곳곳에 배치된 상징을 성실하게 따라가야 하지만, 대답의 일부는 그들 사랑이 다시 피어난 현장에 있다. 그 남녀는 예상치 못하게 가톨릭 행렬에 휩싸였던 것이다. (로셀리니 감독은 실제 행렬에 배우들을 집어 넣어버렸다.) 사람들로 가득 찬 그 행렬의 한복판에서 두 남녀는 사랑의 약동을 다시 경험한다.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렬의 일부가 되었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네덜란드 화가 데니스 판알슬로트가 1615년 벨기에 브뤼셀 행사의 행렬을 그린 작품.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이러한 행렬 의식은 물론 유럽이나 가톨릭 특유의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도 고대부터 권력자의 행렬은 중요한 정치적 행사였다. 권력자는 왜 거대한 비용을 들여서 이런 행렬 의식을 했는가? 관련 연구에 따르면 그러한 의식을 행하면 통치자에게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생기고, 피치자들의 마음에는 정화작용이 일어난다고 한다. 예식의 힘에 매혹되고 나면 그 예식이 만들어내는 질서에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하게 된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중앙 권력에 도전할 소지가 있는 지역에 가서 행렬 의식을 치르곤 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도쿠가와 시대에 쇼군은 다이묘들을 이끌고 오늘날 온천관광지로 유명한 닛코의 동조궁을 자주 참배했고, 다이묘는 다이묘대로 무장행렬을 지어 에도까지 행진했다. 이러한 정치적 행렬은 무력을 과시하는 데 주안점이 있었고, 길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납작 꿇어 엎드렸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19세기 말에 한국을 방문한 영국인 이저벨라 비숍은 한국에서 본 가장 진귀한 광경으로 임금의 행차를 거론했다. 비숍의 눈에는 그 행렬에 동원된 무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왕을 기다리다가 지루해진 기병들은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앉아 있다가 나팔 소리를 듣고서야 후다닥 안장 위로 올라갔다. 놀란 말들은 물어뜯고 차며 비명을 질렀다.”(‘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그러나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백성들에게 그 화려한 의례행사는 대단한 볼거리였음에 틀림없다. 그 점은 조선 후기 문인 윤기(尹愭)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희한한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반드시 쫓아가서 보고, 별난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외진 곳의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쫓아가서 살펴본다. 눈 달린 이라면 볼거리가 있기만 하면 고개 숙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런 것 중에 가장 심한 경우가 바로 임금이 행차할 때다”(凡有目者苟有可以見, 則未有低頭而過者也. 如是矣, 而最是動駕之時).

이탈리아 화가 베노초 고촐리의 작품 ‘동방박사의 행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행렬 주변에 모여든 백성들은 권력자들이 원했던 대로 순치되었을까. 바로 그 점에서 영국과 조선의 큰 차이가 있다고 비숍은 말했다. 비숍에 따르면 영국 여왕의 행렬이 지나갈 때 영국 노동자는 순치되기는커녕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저 돈을 내는 건 우리야, 그런데도 우린 우리 돈이 지나갈 골짜기를 터주기를 좋아하는군.” 그에 비해 “한국 백성들은 왕실에 대해 더 깊은 경의를 가지고 있으며”, “경건한 정적 속에서 자발적으로 운집”하여 이 행렬이 “최대한 빛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았다”.

이는 구경꾼에 불과한 비숍의 상상이었을 뿐, 비숍보다 앞서 임금의 행차를 여러 차례 목격한 윤기는 조선 후기 임금의 행차에 대해 다르게 기록했다. “창문과 문틈으로 훔쳐보느라 얼굴이 드러난다. 길가의 곁눈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잖을 빼지 않는다. 노비들이 궁시렁거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염치와 체모를 모두 내팽개친다”(從窓而瞰, 由隙而闚, 露出面貌, 不顧道路之睨視, 喪失容儀, 不避皁隷之指點. 凡係廉恥體貌, 並皆放倒). 즉, 양반들마저 진귀한 눈요깃거리에 흥분했고, 노비들은 그런 양반들을 비웃었던 것이다.

이처럼 행렬의 현장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진다. 권력자는 권력을 과시하고, 호사가는 눈요기를 하고, 피치자는 권력자를 비판하고, 동네 깡패들은 그 틈을 타서 싸움을 벌인다(영화 ‘대부2’에서 행렬 장면). 나는 이번 안트베르펜 행렬의식에서 무엇인가를 따르는 데서 오는 고양감을 경험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양감에는, 뭔가를 리드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고, 저항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고, 함께 결정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고, 판을 깨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지만, 묵종(默從)하는 데서 오는 고양감도 있다. 행렬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행렬에 직접 참여할 때 비로소 자발성과 순종이 양립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