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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간 칼날이 녹슬지도, 무늬가 흐릿해지지도 않았다… 상식을 벤 청동 보검[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입력 | 2024-09-09 23:00:00

‘와신상담’ 고사 월왕 구천의 검… 칼날 위 다이아몬드형 무늬 생생
탁월한 주석 담금질-도금기술 덕… 대나무 상자에 밀봉 보관도 한몫
中 명검 기술 마한지역에 전해져



1965년 발굴된 월나라 왕 구천의 청동검. 2500년 동안 녹슬지 않은 데다 표면의 다이아몬드형 무늬도 완벽하게 남아 있어 주목을 끌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춘추시대 발달했던 명검의 비밀


인간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무기를 개발한다. 총이 도입되기 전에는 명검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인검, 영국 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그리고 다마스쿠스 칼까지 첨단 기술로 칼을 만들어왔다. 중국에서도 2500년 전 와신상담과 오월동주의 고사성어로 유명한 춘추시대 양자강 유역에서 명검이 발달했다. 보복하거나 재기를 위해 고난을 참는다는 뜻의 한자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은 기원전 6세기 서로 앙숙이었던 중국 장강(양자강) 유역 오나라와 월나라의 경쟁에서 유래한다.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장작더미 위에 자면서 노력해 월나라의 구천(句踐)과 겨뤄 그를 포로로 잡았다. 구천은 미인 서시를 바치고 스스로 부차의 몸종이 되어 대변을 맛보고 가족들도 노예가 되는 치욕을 견딘 끝에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준비한 끝에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부차를 죽이고 결국 복수에 성공했다. 너무나 유명한 이 고사의 주인공인 월왕 구천의 검이 실제로 1965년 후베이 장링의 초나라 귀족 무덤에서 발견됐다. 표면의 다이아몬드형 무늬도 완벽하게 남아 주목을 끌었다. 그 검의 표면에는 월왕 구천이 직접 사용하는 것이라는 글귀가 황금으로 새겨 있었다.

사실 월왕 구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20개가 넘는 오나라와 월나라 왕들의 검이 중국 곳곳에서 발굴됐다. 그런데 유독 월왕구천검이 주목받은 것은 칼 위의 아름다운 무늬가 생생하여 녹이 슬지 않은 상태였고, 칼날이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2023년 발견된 진시황 병마용과 청동검. 사진 출처 런민왕

놀라움은 진시황의 병마용에서도 이어졌다. 1970년대에 발굴된 병마용에 장착된 실제 무기 중에는 길이가 거의 1m에 이르는 전혀 녹이 슬지 않은 동검도 있었다. 어떻게 2500년이 지났는데 멀쩡할 수 있을까 큰 관심을 불러왔다.

청동(bronze)은 구리와 주석을 섞은 것으로 제작 당시에는 황금에 가까운 빛을 띠지만 조금만 관리를 안 해도 퍼렇게 녹이 슨다. ‘청동’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그 이유에서다. 그런데 왜 오월과 진나라의 검은 수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도 녹이 슬지 않았을까. 혹시 잃어버린 고대 기술이 있었을까 관심이 있던 차에 ‘크롬 도금’을 했을 것이란 가설이 등장했다. 진시황의 동검 표면의 성분을 분석하니 크롬이 소량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크롬 도금은 목욕탕 수도꼭지와 같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널리 쓰이는 기법이다. 지금의 크롬 도금은 1920년대에 상업화가 되었다.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불가사의로 간주되는 진시황의 병마용이니 크롬을 사용하는 기술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크롬 가설은 부정되었다. 칼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여러 옻칠한 색소에서도 크롬이 검출되었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고대 유물은 귀하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하여 분석하지 못한다. 그 대신에 유물 가장자리의 깨진 조각이나 부스러기를 모아 검사하다 보니 칼집과 주변에 색을 입히는 칠에 포함된 크롬이 검출된 것이다. 비슷한 오해는 한국 청동기에도 있었다. 한동안 한국의 청동기에는 아연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연이 섞인 청동기는 고대부터 세계 곳곳에 있었지만 이는 의도치 않게 미량원소가 들어간 결과였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가 이어지면서 명검을 만든 기술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월왕구천검의 비밀은 바로 장인들의 솜씨였다. 600도 이상의 온도로 장기간 가열하여 주석을 표면에 입힌 주석 담금질이나 주석 아말감의 기법으로 만든 것이다. 다이아몬드 같은 아름다운 무늬는 가황 처리를 한 금속을 그 표면에 붙인 것이다. 왕에게 바치는 것이니 장인들은 자신들만의 비법을 총동원하여 가공했고, 심혈을 기울인 도금 기법으로 다른 칼에서는 볼 수 없는 오묘한 무늬를 만든 것이다.

명검이 오월 지역에서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 지역의 역사가 숨어 있었다. 오와 월나라 지역은 예로부터 밀림 지역이어서 전차들이 제대로 다니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찍이 자신의 분신처럼 청동칼을 지니고 다녔고, 수많은 장인이 등장했다. 월나라의 역사를 다룬 ‘월절서’와 ‘오월춘추’라는 책에는 ‘구야자(歐冶子)’ ‘간장(干將)’ ‘막야(莫耶)’와 같은 장인의 이름을 딴 명검이 등장한다. 심지어 암살용으로 생선 요리에 넣어서 감출 수 있는 ‘어장(魚腸)’이란 검도 있었다. 마치 21세기의 열강들이 첨단 무기에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하듯이 오와 월나라는 경쟁하며 보검을 만들었다. 보검은 한정판으로 만들어져서 왕과 귀족들이 소유했고, 보검 기술의 유출 방지를 위해 장인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월왕구천검 같은 신비한 기술을 100% 밝히기는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한다.

명검이 수천 년 동안 녹이 슬지 않았던 또 다른 배경은 동검이 발견된 토양과 환경에 있다. 구천의 칼은 명검이니 사용할 때도 관리를 치밀하게 했다. 칼이 발견된 무덤은 나무로 귀틀을 단단하게 지어서 만들었다. 칼은 옻칠한 검집과 대나무 상자 안에 밀봉된 채 놓여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지역은 미라가 많이 나오기로 유명하다. 유명한 마왕두이 무덤을 비롯해 미라가 많이 발견된다. 월왕구천검이 발굴된 후베이 장링의 다른 초나라의 무덤에서는 60대 미라가 별다른 처리를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발견 당시에 잠을 자는 듯한 모습으로 발견돼 산전수전 다 겪은 고고학자들마저 경악할 정도였다.

전북 완주 상림리에서 발굴된 중국의 동검. 중국의 장인들이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제공

오월 지역에서 시작된 명검은 중국은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전해졌다. 전북 완주 상림리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은 중국의 동검 26개가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영향을 받은 마한의 청동기문화가 가장 먼저 발달한 곳이다. 동검은 무덤이 아니라 누군가가 모아서 땅에 묻은 것이었다. 청동기의 장인들은 동검을 만들 때 비밀스러운 의식을 하고 자신들이 만든 청동기나 거푸집을 땅속에 묻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중국의 동검 이외에는 중국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걸로 봐서 중국 사람들이 이민 온 것은 아니라 청동기를 만들던 장인들이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이해가 된다. 진시황이 통일한 직후 중국에서는 철제 칼이 널리 유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청동으로 명검을 만들던 장인들이 설 땅은 없어졌다. 같은 시기 동검을 계속 사용하던 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남방 광둥 지역이었으니, 장인들은 서해안을 따라서 이동했을 것이다. 한반도의 세형동검에도 양자강 유역의 명검 전통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고고학 발굴이 이어지면서 결국 고대이건 현대이건 놀라운 비밀은 결국 사람의 기술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월왕 구천뿐만 아니라 오왕 합려, 철천지원수였던 오나라 왕 부차의 검이나 창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중국 최고의 명검은 오월의 경쟁과 동검 명인에 대한 투자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월의 명검은 그들과 관계없는 중국 곳곳의 귀족들 무덤에서 발견된다. 두 나라가 복수에 복수를 잇는 전쟁을 하며 국력은 함께 쇠퇴했고 결국 기원전 306년 초나라에 멸망했다. 허무한 멸망 직후 오월의 명검들은 사방으로 팔려 나갔고, 중국 제후국의 여러 귀족은 앞다퉈 오월의 명검을 수집했다. 아마 각 귀족은 자신의 궁궐에 월왕 구천과 오왕 부차의 검을 걸어놓고 그들의 이야기꽃을 피웠을 것이다. 오와 월의 기술은 나라의 멸망과 함께 뿔뿔이 흩어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무기가 있다고 해도 국가가 망하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역사의 쓰디쓴 교훈이 여기에서도 되풀이된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