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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칼럼]‘리베로 특보’가 필요해 안보실장을 뺐다는데

입력 | 2024-09-09 23:21:00

트럼프 1기 ‘실패한 참모’의 대통령 보좌論
“듣고 싶어 하는 말 아닌 필요한 말을 해야”
尹 임기 절반도 안 돼 벌써 4번째 안보실장
설명도 군색한 ‘임시변통 인사’ 성공하겠나



이철희 논설위원



H R 맥매스터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펴낸 회고록 ‘우리 자신과의 전쟁’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초기 13개월간 외교안보 사령탑으로 일하면서 겪은 성취와 실망, 분투의 기록이다. 책에는 성과와 보람, 자부심보다는 좌절과 모욕, 회한이 진하게 배어 있다.

우직한 군인 맥매스터가 일하게 된 백악관은 상상을 뛰어넘는 요지경 전쟁터였다. 매사에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뭐든 반대로 하기 일쑤인 청개구리 성향의(contrarian) 트럼프를 보스로 모시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터. 게다가 아첨으로 트럼프의 환심을 사고 밀고로 참모진을 이간시키는 모사꾼들, 트럼프의 기벽에 질려 회피와 태업을 일삼는 이른바 ‘어른’ 장관들까지 맥매스터는 책 제목 그대로 내부의 적(敵)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맞서 ‘최대의 압박’ 정책을 펴던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의 유화 제스처에 마치 빨려 들어가듯 대화 국면으로 전환한 것도 그런 내부 분열과 혼란이 한몫한 결과였다. ‘북한 완전 파괴’를 외치던 트럼프는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 “한미 군사훈련은 도발적”이라는 데 선뜻 동의하며 “돈 낭비”라고 맞장구치고, 국방장관은 대북 군사옵션을 포함한 비상계획에 “우린 전쟁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며 손사래 치고, 국무장관은 중국을 통한 대화를 모색하며 제3국 제재마저 반대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맥매스터로서는 ‘대통령의 결정에 앞서 최고의 분석과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기 위해, 대통령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필요한 얘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보스의 신뢰를 얻지 못해 불과 1년여 만에 쫓겨난 맥매스터는 실패한 안보보좌관 중 한 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사실 가장 성공적인 안보보좌관의 롤 모델인 헨리 키신저와 비교하면 맥매스터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다. 키신저 역시 알코올의존증과 우울증세를 가진 불안정한 성격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아래서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그 직을 수행했다. 닉슨의 구상을 구체적 성과로 구현하기 위해 때론 아부하고 때론 도전한 결과 키신저는 ‘전설’로 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맥매스터가 실패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지휘 아래 작성된 국가안보전략(NSS) 등 각종 전략문서는 발간 당시엔 트럼프의 좌충우돌 탓에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탈냉전 이래 미국 대외전략의 근본적 전환을 예고한 문서로 재평가받았다. 중국과 러시아를 미국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특히 대(對)중국 정책을 ‘관여’에서 ‘경쟁’으로 변경한 대목은 조 바이든 행정부 들어 새롭게 포장된 정책들로 구체화됐다.

이렇듯 그 성공도 실패도 가볍게 다뤄지지 않는 것은 안보보좌관 자리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에 상응하는 우리의 국가안보실장은 어떤가. 지난달 갑작스러운 외교안보 라인 개편 속에 안보실장도 교체됐다. 윤석열 정부 임기가 절반도 안 지났는데 벌써 네 번째 안보실장이다. 한데 그 사유를 놓고 당초 대통령실은 ‘외교보다 안보를 보강하기 위해서’라더니, 얼마 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리베로 특보가 필요해서’라고 설명했다.

사실 대통령 측근을 국방부 장관에 앉히면서 생겨난 연쇄 인사로 안보실장이 특보로 튕겨나간 것일 터인데, 그 뻔한 이유를 이리저리 돌려 말하다 보니 신설한 ‘리베로 특보’가 매우 중요한 자리이고 ‘붙박이 안보실장’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자리인 것처럼 돼 버렸다. 여기에 어차피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안보실의 진짜 실세는 따로 있는데 실장이 누가 되든 달라질 게 있겠냐는 얘기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대통령실에선 이제 특보가 ‘상시 특사’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조직의 생리나 관행상 급조된 자리가 과연 주변과의 마찰이나 잡음 없이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적임자를 적소에 배치하고 필요하다면 새 자리를 만드는 것은 온전히 대통령의 권한이다. 하지만 임시변통의 실험적 용인(用人)이 성공적이었던 예는 드물다.

일찍이 키신저도 “우편함 없는 정부 자리는 받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당장 우편물 받을 변변한 사무실도 없는 고문이나 특보 같은 자리, 결국 끼어들고 참견하는 자리는 맡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맥매스터의 후임이자 또 한 명의 실패한 참모인 존 볼턴이 트럼프가 자신에게 안보보좌관이 아닌 ‘다른 타이틀의 자리는 어떠냐’고 제안하자 거절했다면서 새삼 상기했다는 현실론적 지침이기도 하다.(볼턴의 책 ‘그 일이 일어난 방’)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