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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육필편지, 93년 만에 공개된다…“자유평등 세계관 느껴져”

입력 | 2024-09-10 11:23:00

기념관 임시 이전 기념…11일 오후 개관식 개최
“조선 양반가였음에도 조선 지배 언어체계 탈피”
“아내에 존칭…자유평등 사상 유추해 볼 수 있어”



9일 서울 중구 남산예장공원 개장과 함께 우당 이회영 기념관이 개관했다. 사진은 기념관 내부 모습. 2021.06.09. 뉴시스


막대한 재산과 목숨을 바쳐 온 가족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던 우당 이회영과 형제, 동지를 기리는 공간인 이회영기념관이 서울 종로구 사직동 옛 선교사 주택인 ‘묵은집’으로 임시 이전한다. 이를 기념해 이회영 선생의 육필 편지가 최초로 공개된다.

이회영기념관 측은 오는 11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개관식을 열고 지하 1층에 지상 2층, 총 면적 311㎡ 규모로 새 단장한 이회영기념관을 선보인다고 10일 밝혔다.

이회영기념관은 2021년 6월 남산예장자락에 개관했으며 이번에 묵은집으로 임시 이전한다.

2019년 서울시가 우수건축자산으로 지정한 사직동 묵은집은 미국 남감리교가 조선 땅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살았던 서양식 주택이다.

묵은집은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자 동지인 이은숙 선생이 서울에서 활동할 때 머물던 당주동 집과 몇 백 걸음 떨어져 있다. 이회영 선생의 동지인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경천 장군 집터 또한 기념관 바로 아래에 있다.

시는 오랫동안 닫혀있던 사직동 묵은집에 이회영기념관 이전을 위해 정원을 가꾸고 전시실을 기획하는 등 안팎을 새 단장했다. 이회영기념관은 2026년 이회영 선생 집터 인근 명동문화공원 내로 완전 이전할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개관식에는 김병민 서울시 정무부시장, 이종찬 광복회장 등 이회영 선생의 후손, 이종걸 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 이사장·임직원, 독립운동가 후손, 지역 주민 등 80여명이 참석한다.

기념관 이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이회영 선생의 육필 편지가 최초로 공개된다.

개관 기념 특별전 ‘등불 아래 몇 자 적소’를 통해 공개되는 유품은 편지 20장 13통과 편지 봉투 8장, 부친 이회영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딸 규숙의 전보 3장 등이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이 부친 유품을 정리하던 지난해 겨울 이 유품을 발견했다.

편지 대부분은 이회영 선생이 한국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기지로서 만주를 포기할 수 없어 만주행을 결심할 무렵인 1931년에 쓴 것으로 93년 만에 세상에 공개되는 셈이다.
독립투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묵란(사군자의 하나인 난초를 소재로 수묵으로 그린 그림)을 그린 뒤 조국으로 보내 팔았다는 편지 내용에서 이회영과 묵란의 관계, 그리고 예술가 이회영을 확인할 수 있다.

이회영 선생이 쓴 편지는 모두 한글로 쓰였다.

시는 “조선 양반가에서 성장해온 이회영이 조선 지배 언어체계를 스스로 벗어던지고 있다는 점, 과장된 수식어나 관념어 없이 일상어 중심으로 글을 쓴 점, 수신자인 아내에게 한결같이 존칭어를 사용한 점 등을 통해 자유 평등 사상을 추구한 이회영의 세계관과 됨됨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새로 개관하는 이회영기념관 앞에는 수령을 합해 300살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마당이 있다.

기념관 1층에는 이회영 6형제에 관한 소개와 서울 도심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벗집 마루가 있다. 전시장으로 가는 길 복도와 계단 곳곳에는 서울, 서간도, 베이징, 상하이, 다롄 등 일제와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경로와 우당과 형제들의 이야기가 전시돼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이회영 선생이 그린 그림과 부인인 독립운동가 이은숙이 쓴 ‘서간도 시종기’와 육필 원고 등이 전시돼 있다. 체코군단의 지원으로 독립군이 사용했던 모신 소총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권총과 같은 종인 FN M190 등도 볼 수 있다.

전시는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서해성 감독은 “망명 독립운동가에게 편지는 살아 있다는 신호이자 식구들과 끈을 잇는 유일한 통신 수단이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이회영 선생뿐 아니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 일상과 당시 심경을 추적해볼 수 있다. 아울러 붓을 든 예술가이자 독립투사 이회영의 내면과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병민 정무부시장은 “오래도록 닫혀 있던 사직동 묵은집이 ‘시민 벗집’으로 단장해 우당 이회영 선생을 만나는 공간으로 문을 열었다”며 “새롭게 가꾼 정원과 푸른 마당을 품은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살아 있는 독립운동 역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부원군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조선에서 손 꼽히는 갑부였던 이회영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여섯 형제, 해방시킨 노비 등 60여명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후 구국 활동에 헌신했다. 이회영 선생은 이주할 때 약 270만평의 토지 등 전 재산을 처분해 당시 돈으로 약 40만원의 자금을 마련, 이 돈을 최초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썼다. 그가 처분한 토지는 현재 공시지가로는 조 단위의 막대한 금액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 당한 끝에 1932년 11월17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