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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 된 창경궁, 벚꽃 야간개장… “하루 1만 인파, 꽃구경 사람구경”[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입력 | 2024-09-11 23:03:00

1907년 창경궁 전각들 대거 철거
동식물원-박물관-도서관 등 건립… 명분은 “거처 옮긴 순종 위로 목적”
밤 벚꽃놀이, 대표적 연례행사 돼… 벚나무에 전등 환히 밝혀 “불야성”
젊은 남녀 몰리는 밤 문화 명소로



일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창경궁을 동식물원, 박물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종합 유원지’로 개조해 일반에 개방했다. 창경원으로 불리게 된 당시 모습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들에 남아 있다. 창경원에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1924년부터는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대중잡지 ‘별건곤’ 1934년 4월호에는 봄을 맞아 ‘꿈같은 눈물의 환상, 옛 궁궐 창경원의 벚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창경원의 벚꽃이 서울의 명소요 조선의 명소가 된 지는 오래다. 그러나 해마다 돌아오는 양춘의 봄을 맞이할 때마다 서울의 창경원 벚꽃은 서울 사람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꽃구름 같은 꽃 왕가의 장중한 옛 추녀를 감싸고 도는 꽃구름의 희롱은 화창한 봄의 한없는 기쁨과 끝없는 애절의 느낌을 주는 경색이다. 꿈같은 눈물의 환상이기도 하다.”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과 옛 궁궐의 변모를 바라보는 애잔함의 대조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어떤 연유로 ‘궁궐(창경궁·昌慶宮)’은 ‘동산(창경원·昌慶苑)’이 된 것일까?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바로 옆에 지은 수강궁 자리이다.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창경궁으로 궁호를 바꾸었다. 이후 창경궁은 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 어려운 현 국왕보다 항렬이 높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다. 창덕궁과 합쳐 동궐(東闕)이라고 불린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하나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창경궁이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마지막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 창경궁의 전각들을 대거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이런 작업을 주도한 것은 메이지 초기 사법 관리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차관으로 부임한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다. 그는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순종의 쓸쓸함을 위로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고미야는 병합 직후까지 궁내부를 개편한 이왕직(李王職) 차관을 지내며 황실의 식민지적 재편을 주도한 인물이다.

창경원 동물원의 대수금실(大水禽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창경원 식물원의 대온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먼저 동물원과 식물원을 건립했다. 동물원은 당시 유한성이라는 사람이 준비하던 사립 동물원의 동물을 인수하여 1909년 개원했다. 1912년에는 냉온수관과 배수관을 설비한 동물 온실까지 설치했다. 주로 독일을 통해 다양한 동물을 수입했다. 동물원과 같이 개원한 식물원은 철골 구조에 유리를 사용한 최신식 건물로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온실로 알려졌다.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 식물로 꾸몄다. 대온실 앞에는 유럽식의 분수를 설치하고 조선 시대 국왕이 친경(親耕) 의례를 하던 권농장을 파서 춘당지(春塘池)라는 연못과 수정(水亭)이라는 일본식 정자도 지었다.

박물관은 1912년 준공했다. 양식 벽돌 2층 건물에 교토 인근 우지(宇治)의 유서 깊은 사찰인 뵤도인(平等院) 호오도(鳳凰堂)를 본뜬 지붕을 얹었다. 호오도는 지금도 10엔 동전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이다. 박물관을 건립한 자경전 터는 창경궁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자리로 일본 고건축의 예술성을 재현한 박물관의 지붕은 어디서나 잘 보이게 된 셈이다. 이어서 1915년에는 4층 규모의 양식 건물로 도서관 용도의 장서각(藏書閣)도 준공했다.

창경원 박물관 전경. 1983년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동물원과 박물관은 철거됐고 대온실은 건축적 가치가 인정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이런 과정을 거쳐 병합 전후 창경궁은 동식물원, 박물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일종의 ‘종합 유원지’로 개조되었다. 처음에는 어원(御苑)이라고 불렸으며, 곧 자연스럽게 창경원이라고 불렸다. 이런 방식의 공간 개조는 일본에 선례가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성한 일본 최초의 근대 공원이라는 도쿄의 우에노(上野) 공원이 그것이다. 에도 시대 우에노 일대에는 도쿠가와 막부와 에도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간에이지(寬永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간에이지는 일본 천태종의 간토 총본산으로 단지 사찰일 뿐 아니라 도쿠가와 가문의 몇몇 쇼군의 묘와 사당이 있는 ‘막부의 성소’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이곳을 공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에 개방했다. 또 박물관, 동물원 등을 건립하여 에도 시대의 색채를 지우고 신정부의 이념을 전파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했다.

고미야는 창경원 조성의 목적으로 순종을 위로하는 것 외에 “세인에게 취미와 지식을 보급하고자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에노 공원의 방식을 조선 왕조의 한양을 식민지 수도 경성으로 재편하는 데 적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동식물원을 개원하면서 일, 목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창경원을 일반에 개방하기로 했다. 이로써 옛 궁궐은 완전히 유원지가 되었다.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경성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연간 관람객은 늘 10만∼20만 사이였다. 1917년 4월 22일에는 “경성 사람 스무 명 중 한 명은 동물원에 들어”와 하루 관람객이 무려 1만2966명에 이르렀다는 기사도 보인다(‘매일신보’ 1917년 4월 23일).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7년판에 따르면 12월 말 현재 경성부 인구는 25만3154명이었다. 특히 봄에 관람객이 폭증하자 1918년부터는 4, 5월에는 특별히 매일 개원하고 학생 등의 단체 관람 할인도 적용했다. 종로 4정목에서 북행하는 전차 노선도 처음에는 총독부의원 앞(현재 서울대병원 자리)을 지난다고 하여 ‘총독부의원선’이라고 불렸는데, 어느 새부턴가 ‘창경원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꽃놀이 봄놀이 터로 가장 많은 손을 맞아들이는 동물원”의 인기는 계속되어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다(‘동아일보’ 1924년 3월 11일).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다. 각종 공연도 개최되었다.

벚꽃놀이 철 군중이 운집한 창경원 정문(홍화문) 앞. 오른쪽에 ‘야간 개원’ 안내문이 쓰여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상의 ‘밤 문화’가 형성되기 어려웠던 당시 경성에서 “25만 와트라는 엄청난 조명”이 “문자 그대로의 불야성”을 이룬 창경원 야앵의 인기는 대단했다(‘매일신보’ 1936년 4월 29일). “사람의 물결로 보자니 불빛이 너무도 현란하고 불빛으로만 보자니 꽃이 그 또한 너무도 황홀하지 않은가!”라는 경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동아일보’ 1939년 4월 18일). 야앵 기간에는 창경원선 전차도 특별히 증차되었으나 “종로 4정목 어구에서는 여차장, 남차장이 밀려드는 노도 같은 인파를 전차 속으로 몰아넣느라고 경매장 앞잡이처럼 목이 터지라고 어서 타요! 앞으로 닦아서세요!를 발악하듯” 외쳤다(‘동아일보’ 1936년 4월 29일). 특히 젊은이들에게 야앵의 목적은 물론 꽃구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구경하는가 하면 그들의 눈총은 으슥한 곳으로 혹은 젊은 여자들의 다리로, 그리고 여자는 사나이의 끔벅이는 눈에 해죽거리며 따르는” ‘은밀한 일탈’도 밤 나들이의 볼거리였다(‘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1937년 8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도 제국주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창경원 야앵은 계속되었지만 그 의미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매일신보는 “전시 아래의 인식을 두터히 하여 청아한 마음으로 벚꽃의 밤을 조용히 즐긴다”든지(‘매일신보’ 1938년 4월 20일) “시국 영화와 뉴스 영화를 보면서 꽃향기에 취한 흥분을 가다듬는 군중들의 태도”를 전한다(‘매일신보’ 1939년 4월 18일). 이제 밤 벚꽃놀이마저 전시 후방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경건한 시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한 송이 두 송이 연연한 모습을 한 벚꽃은 우리 일선의 용사”를 떠올려야 했다(‘매일신보’ 1942년 4월 19일).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서 경성 시민의 일상 행락은 군국주의의 애도로 치환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