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창경궁 전각들 대거 철거 동식물원-박물관-도서관 등 건립… 명분은 “거처 옮긴 순종 위로 목적” 밤 벚꽃놀이, 대표적 연례행사 돼… 벚나무에 전등 환히 밝혀 “불야성” 젊은 남녀 몰리는 밤 문화 명소로
일제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로 창경궁을 동식물원, 박물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종합 유원지’로 개조해 일반에 개방했다. 창경원으로 불리게 된 당시 모습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들에 남아 있다. 창경원에 벚나무를 대량으로 심어 1924년부터는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대중잡지 ‘별건곤’ 1934년 4월호에는 봄을 맞아 ‘꿈같은 눈물의 환상, 옛 궁궐 창경원의 벚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창경원의 벚꽃이 서울의 명소요 조선의 명소가 된 지는 오래다. 그러나 해마다 돌아오는 양춘의 봄을 맞이할 때마다 서울의 창경원 벚꽃은 서울 사람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꽃구름 같은 꽃 왕가의 장중한 옛 추녀를 감싸고 도는 꽃구름의 희롱은 화창한 봄의 한없는 기쁨과 끝없는 애절의 느낌을 주는 경색이다. 꿈같은 눈물의 환상이기도 하다.” 만개한 벚꽃의 아름다움과 옛 궁궐의 변모를 바라보는 애잔함의 대조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어떤 연유로 ‘궁궐(창경궁·昌慶宮)’은 ‘동산(창경원·昌慶苑)’이 된 것일까?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덕궁 바로 옆에 지은 수강궁 자리이다.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창경궁으로 궁호를 바꾸었다. 이후 창경궁은 주로 창덕궁에 거처하기 어려운 현 국왕보다 항렬이 높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쓰였다. 창덕궁과 합쳐 동궐(東闕)이라고 불린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하나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창경원 동물원의 대수금실(大水禽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창경원 식물원의 대온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박물관은 1912년 준공했다. 양식 벽돌 2층 건물에 교토 인근 우지(宇治)의 유서 깊은 사찰인 뵤도인(平等院) 호오도(鳳凰堂)를 본뜬 지붕을 얹었다. 호오도는 지금도 10엔 동전의 뒷면에 새겨져 있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이다. 박물관을 건립한 자경전 터는 창경궁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자리로 일본 고건축의 예술성을 재현한 박물관의 지붕은 어디서나 잘 보이게 된 셈이다. 이어서 1915년에는 4층 규모의 양식 건물로 도서관 용도의 장서각(藏書閣)도 준공했다.
창경원 박물관 전경. 1983년 창경궁 복원 사업으로 동물원과 박물관은 철거됐고 대온실은 건축적 가치가 인정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경성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연간 관람객은 늘 10만∼20만 사이였다. 1917년 4월 22일에는 “경성 사람 스무 명 중 한 명은 동물원에 들어”와 하루 관람객이 무려 1만2966명에 이르렀다는 기사도 보인다(‘매일신보’ 1917년 4월 23일).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7년판에 따르면 12월 말 현재 경성부 인구는 25만3154명이었다. 특히 봄에 관람객이 폭증하자 1918년부터는 4, 5월에는 특별히 매일 개원하고 학생 등의 단체 관람 할인도 적용했다. 종로 4정목에서 북행하는 전차 노선도 처음에는 총독부의원 앞(현재 서울대병원 자리)을 지난다고 하여 ‘총독부의원선’이라고 불렸는데, 어느 새부턴가 ‘창경원선’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해마다 꽃놀이 봄놀이 터로 가장 많은 손을 맞아들이는 동물원”의 인기는 계속되어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다(‘동아일보’ 1924년 3월 11일).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다. 각종 공연도 개최되었다.
벚꽃놀이 철 군중이 운집한 창경원 정문(홍화문) 앞. 오른쪽에 ‘야간 개원’ 안내문이 쓰여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37년 8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도 제국주의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창경원 야앵은 계속되었지만 그 의미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매일신보는 “전시 아래의 인식을 두터히 하여 청아한 마음으로 벚꽃의 밤을 조용히 즐긴다”든지(‘매일신보’ 1938년 4월 20일) “시국 영화와 뉴스 영화를 보면서 꽃향기에 취한 흥분을 가다듬는 군중들의 태도”를 전한다(‘매일신보’ 1939년 4월 18일). 이제 밤 벚꽃놀이마저 전시 후방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경건한 시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한 송이 두 송이 연연한 모습을 한 벚꽃은 우리 일선의 용사”를 떠올려야 했다(‘매일신보’ 1942년 4월 19일). 태평양 전쟁의 한복판에서 경성 시민의 일상 행락은 군국주의의 애도로 치환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