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평생 잘 살고 남은 유산, 베풀 수 있어 행복합니다”

입력 | 2024-09-12 03:00:00

사랑의열매 유산기부 제도
거주 중인 아파트 사후 기부 서약
2013년부터 노후자금 등 나눔 실천… “받는 이보다 주는 이가 더 기쁜 일”
보험금-조의금 등 기부 방식 다양… 신탁 활용해 안전성-신뢰성 확보



2017년 현재 거주 중인 30평대 아파트를 사후에 유산기부하겠다고 밝힌 김기호 씨. 김 씨는 “평생 잘 살고 남은 유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으니 기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공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인데, 평생 잘 살고 남은 유산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으니 제가 더 기쁘고 행복합니다.”

대구에 사는 김기호 씨(89)는 1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자신의 아파트를 유산기부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산기부란 사후에 남겨질 재산이 공익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비영리기관이나 복지단체, 재단 등에 기부하는 것이다. 김 씨는 2017년 지금 거주하는 30평대 아파트를 사후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모금회)에 기부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쓰이게 하겠다고 서약했다.

●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유산기부

김 씨가 유산기부를 결심한 배경에는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지론이 있었다. 김 씨는 “남편은 항상 작은 것도 이웃들과 나누고 싶어 했고 그게 옳다고 믿었다”며 “우리 부부가 끝까지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2013년에도 노후 자금으로 모은 1억 원을 기부해 대구 최초로 여성 아너 소사이어티(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 회원이 됐다. 이듬해에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이름으로 다시 1억 원을 기부해 부부가 나란히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그는 “콩 한 쪽도 나눠 먹었다는 선조들의 정을 생각하면 작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 마음이 부끄러웠다”며 “나눔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에게 더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유산기부’는 크게 3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유언을 공정증서에 남기며 기부 약정을 하는 것이다. 사망 보험금 등의 보험 수익자를 기부단체로 지정하거나 금융사에서 운영하는 신탁에 가입하고 신탁 수익자를 기부단체로 지정할 수도 있다.

올해 5월 세상을 떠난 홍계향 씨도 생전에 모금회를 통해 유산기부 서약을 했다. 홍 씨는 평생 노점상, 지하철 역사 청소원, 가사 도우미 등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주택을 내놓았다. 그는 남편과 외동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친구로부터 ‘살아 있을 때 좋은 일을 많이 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유산기부를 결심했다. 홍 씨는 생전 기부 서약을 마친 뒤 주변에 “유산기부를 결심한 날이 평생 가장 신나는 하루였다. 욕심을 부리며 전부 지고 가기보다 나누고 가는 길을 선택해 마음도 가볍고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 유산기부 전문 상담부터 유가족 예우까지

모금회는 2005년부터 부동산, 보험금, 장례 조의금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유산기부를 받고 있다. 전문 유산기부 프로그램인 ‘레거시 클럽(Legacy Club)’을 발족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웃 사랑을 전한 고인의 숭고한 신념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융, 법률, 세무 등 전문가 그룹을 구성해 유산기부 상담도 제공한다. 기부를 서약하면 사후 유언을 집행하고 유가족을 예우하는 과정까지 책임진다. 모금회에 기부한 돈은 현행법상 상속세 및 증여세 과세 가액에서도 제외된다. 모금회 관계자는 “상속인이 상속세 신고 기한 내 기부할 경우 상속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고 기부를 받은 모금회 역시 증여세 과세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모금회는 한국여성변호사회 등 전문가 그룹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믿을 수 있는 유산기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달 9일에는 신한금융그룹과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신한금융그룹은 유언대용신탁, 기부신탁 등 신탁상품 맞춤형 상담 및 종합자산관리 컨설팅을 제공하기로 했다. 모금회 관계자는 “유산기부에 신탁을 활용해 유산기부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국내에서 유산기부를 하는 비율은 아직 해외 선진국과 비교할 때 미미한 수준이다. 미국은 전체 기부에서 유산기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8%, 영국은 16%가량인데 한국은 0.09%에 불과하다. 김병준 모금회장은 “개인의 뜻깊은 유산기부가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도록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