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기소, 재판 등 사법 작용의 대상이 되는 일’. ‘사건’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사건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법조팀 기자들이 전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 이야기들에 대해 더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지난달 16일 오전 11시 30분경 경기 안산의 한 오피스텔 주차장. 주차된 차량으로 향하던 김찬식 씨(가명·51)는 불쑥 말을 걸어온 남성의 얼굴을 보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김찬식 씨 맞죠? 저희랑 같이 가시죠.”
다시는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얼굴. 4개월 전 검사실에서 마주했던 그 검사가 틀림없었다. 김 씨는 말문이 막힌 채 검사와 수사관이 안내하는 차량 뒷좌석에 탑승했다. 김 씨는 문득 자신을 어떻게 찾아낸 건지 궁금해졌다.
김 씨의 슬쩍 떠보는 질문에도 검사는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수사관이 김 씨의 가방을 열어보니 휴대전화 4대와 다른 사람 명의의 체크카드, 신용카드가 발견됐다. 김 씨는 곧장 수원지검 평택지청으로 압송됐다. 4개월 동안 부천과 여주, 안산, 인천, 화성, 안성 등 경기도 곳곳을 누비던 사기 피의자 김 씨의 도주 행각은 이렇게 끝이 났다.
10일 수원지검 평택지청 이수호 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며 도주 피의자를 추적해 검거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교도소 출소 후에도 멈추지 못한 범행
사기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김 씨는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2018년 11월 교도소 문을 나섰다. 하지만 복역한 뒤에도 김 씨는 사기를 멈추지 못했다. 이듬해 6월 김 씨는 전남 진안군에서 영농조합을 운영하며 양파를 납품하는 최수현 씨(가명)를 찾아갔다.
최 씨는 ‘불경기에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김 씨의 말만 믿고 덜컥 양파 7500만 원어치를 납품했다. 당시 양파 가격은 15kg에 6500원. 150t(톤)은 족히 넘는 양이었다. 하지만 약속한 말일이 지나도 대금은 들어오지 않았다. 김 씨에게 전화해 따져봐도 “곧 보내주겠다”는 말뿐. 며칠간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김 씨가 돈을 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 씨는 그 길로 경찰서에 달려갔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김 씨의 사기 행각은 계속됐다. 김 씨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최 씨 등 3명의 피해자에게 양파와 김 등을 넘겨받아 총 1억 6000만 원 상당의 대금을 주지 않은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반성 않는 피의자, 구속영장 청구 후 시작된 ‘도주극’
“아니 검사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저도 받을 돈을 못 받았다니까요? ○○ 씨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세요. 저도 피해자입니다. 진짜라니까요.”
그러나 김 씨의 변명은 금방 거짓으로 드러났다. 김 씨가 지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김 씨에게 돈을 줬다”며 황당해했다. 김 씨의 범죄 이력을 살펴보니 비슷한 범행으로 입건됐던 것만 80여 차례. 출소 뒤 계속된 범행으로 2020년 1월 이후 총 11번 기소돼 재판도 받고 있었다. 피해자만 40명, 피해액은 16억 원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이 검사가 사건을 수사하자 사문서위조 혐의도 추가로 드러났다. 김 씨가 서류를 위조해 자신에게 권한이 없는 근저당권을 피해자 앞으로 옮겨준 것. 김을 납품하고 대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가 거래 중단을 통보하자 이를 무마하려 벌인 일이었다. 이 검사는 김 씨의 대담한 범행을 보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해 4월 29일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구속영장실질심사 날짜가 잡혔지만 김 씨는 “그날 사정이 있어서 못 간다. 다음 주에 가겠다”며 불출석을 통보했다. 구속심사 기일이 새로 잡혀도 김 씨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구속심사만 세 차례 미뤄졌다. 그제야 판사도 김 씨의 출석을 더 기다리지 않고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김 씨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기록 더미 속에서 찾아낸 실마리
김 씨는 선고를 앞둔 재판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 씨의 휴대전화는 구속영장 청구 이후 꺼졌다 켜졌다만 반복할 뿐, 사용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휴대전화를 켜두고 한곳에 머무를 때는 꺼두는 것 같았다. 김 씨는 병원 진료도 받지 않고, 배달음식도 시키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차량도, 신용카드도 어느 하나 김 씨 명의로 된 것이 없었다. 이 검사는 “작정하고 도주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수사팀은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김 씨를 추적했다. 이 검사는 휴일에도 김 씨의 휴대전화 위치가 파악된 여주에 가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냐” 묻고 다녔다. 혹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김 씨의 재판 기록 수만 장을 건네받아 살펴보기까지 했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김 씨는 차명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김 씨가 기존에 사용하던 휴대전화 통신기록 수천 건을 일일이 분석해 차명 휴대전화를 찾아냈다. 이 검사는 영장을 발부받아 차명 휴대전화 위치를 5분 단위로 파악해 나갔다. 그러자 김 씨의 동선이 ‘점’에서 ‘선’으로, 조금씩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김 씨는 고속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대중교통은 아닌 것 같았다.
“차를 타고 다니는구나.”
이 검사는 김 씨의 휴대전화 위치가 찍힌 고속도로 요금소를 여러 곳 추렸다. 김 씨의 휴대전화가 포착된 시간대 해당 요금소를 통과한 차량 수천 대의 목록을 받아 대조했다. 자료가 겹겹이 쌓이자 나타난 중복된 차량번호. 김 씨의 차량이었다. 이 차량의 최종 목적지를 따라가 보니 경기 안성의 한 공업단지가 나왔다. 추적 4개월 만에 얻어낸 성과였다. ‘이젠 잡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던 참이었다.
이 검사가 김 씨의 은신처로 추정했던 경기 안산의 한 공업단지. 로드뷰로 볼 때는 공사장이었지만 실제로 현장에 가보니 김 씨가 은신처로 사용한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었다. 네이버지도 캡처.
●잠복 끝에 붙잡은 피의자…재개된 재판에서 유죄 판결 나와
김 씨의 은신처를 안성으로 좁혔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애플리케이션 로드뷰로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공사판뿐이었다. 도무지 사람이 먹고 잘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또 허탕인건가….“
이 검사가 고민하자 함께 김 씨를 추적하던 베테랑 수사관이 “이제는 탐문수사가 필요할 때”라고 조언했다. 여주로 위치를 옮겼던 김 씨가 지난달 15일 안산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현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지난달 16일 오전 7시 30분. 도착한 현장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로드뷰에선 공사가 한창이던 자리에 떡하니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었다. 이 검사는 이곳이 김 씨의 은신처임을 직감했다. 주차장에는 김 씨의 것으로 보이는 차량이 추차돼 있었다. 김 씨 사실혼 배우자 박소현 씨(가명) 명의로 오피스텔 한 개 호실이 계약돼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남은 건 김 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잠복 4시간째. 마침내 김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는 쓰지 않던 안경을 착용했지만, 이 검사는 단번에 김 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김 씨 역시 이 검사를 알아본 듯했다. 이 검사는 “김 씨를 찾아내면 희열이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덤덤한 기분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김 씨가 체포 당시 소지했던 휴대전화 4대를 분석하니 그동안 도주를 도운 조력자들이 드러났다. 은신처와 생활비를 제공한 사실혼 배우자 박 씨, 자신들의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 김 씨에게 넘겨준 지인들이었다. 이 검사는 이들을 범인도피 등 혐의로 입건해 김 씨와 함께 불구속 기소했다. 김 씨가 체포되자 멈췄던 재판도 재개됐다. 김 씨는 10일 1심 선고에서 총 6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0일 수원지검 평택지청 이수호 검사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며 도주 피의자를 추적해 검거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이 검사와 김 씨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검사는 이달 2일 정기 인사를 통해 수사부서에서 재판을 담당하는 공판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이 검사가 지난달 31일 기소한 김 씨 사건이 이 검사가 전담하는 재판부로 배당됐다.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이 검사가 김 씨의 재판까지 맡게 된 것이다.
이 검사는 “추적 과정에서 막막했던 순간이 많았다. 경험 많은 수사관님들의 도움이 있어서 김 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김 씨의 재판까지 맡게 된 만큼 재판 과정에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송유근 기자 bi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