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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의 복사뼈[소소칼럼]

입력 | 2024-09-17 11:00:00


동네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여중에 다녔다. 두발 제한 교칙은 ‘귀밑 15cm’였지만 어깨에 머리카락이 닿는 날엔 여지없이 불호령이었다.

안 그래도 교복이 워낙 촌스러웠던 탓에 우리 학교 학생들의 별명은 ‘바둑판’이었다. 그 치마에 대고 바둑을 두어도 판정시비가 없을 정도로 체크무늬가 촘촘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바보 같은 머리에 바보 같은 교복을 입고 바보 같은 짓들을 해대며 서로의 커가는 모습을 우스워하는 것이 그곳만의 재미였다.

1학년 국어를 가르치던 B 선생이 있었다. 지긋한 나이에 퉁퉁한 풍채까지 갖춘 덕에 큰아버지의 자애로움을 기대하게 되는 인상이었다. 요즘과 같은 기껏해야 나른한 날이었을까. 졸음의 끝자락을 붙들고 우는 어렸던 우리에게 그는 말했다.

“엎드려 자지 마라. 여기에서 너희의 A컵, B컵, C컵이 결정된다. 너희는 아직 못 알아듣겠지만” 우리는 그 말을 다 알아들었다. 식민지 시절의 아픈 유산이라며 시험지를 걷을 때 ‘손 머리’를 시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레 여기던 교사였다.

또 다른 교사가 복사뼈를 드러내놓고 다니지 말라고 했을 때, 학교 앞 싸구려 발목 양말조차 부끄러워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당시 우리의 전교 회장이었던 R 양은 후보 시절 “속옷이 비치지 않는 하복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했었다. 블라우스가 속이 훤히 비치는 원단으로 제작된 탓에 ‘브래지어가 비치지 않게 민소매를 겹쳐 입어라’는 교사들의 잔소리로 들들 볶이고 있던 참이었다.

몇몇 교사가 “학생이 교복을 어떻게 바꾸냐”며 말을 보탰고 실제로 공약은 이행되지 못했다. 가끔 짙은 남색 생활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중생들을 보면 난 그때의 R 양이 떠오른다.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고등학교 때는 어느 언덕에 살았다. 왕복 2차로가 간신히 지나다니는 언덕이었다. 하루는 독서실에서 밤늦게 귀가하는데 내 앞에 승용차 한 대가 섰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 바로 앞이었다. 운전자가 가까운 지하철역이 어디냐, 병원이 어디냐 묻기에 아는 대로 가르쳐 주었다. 마침내 가까운 학교가 어디냐 물었을 때 그 남자가 운전대를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는 수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도망쳤다.

다음 날 학교에 가 이 얘기를 했더니 동네에 사는 웬만한 여학생들은 다들 그를 알고 있었다. “나한테도 차 안에서 그랬어.” “파란색 모자 쓰고. 맞지?” “얼굴은 잘생겼던데 왜 그럴까.” “맞아 운동선수 닮았더라. 그 얼굴로 그런 짓 왜 하지?”

커서는 성당에 좀 열심히 다녔다. 청년단체를 살뜰히 챙기던 보좌신부와 회식을 하는데, 다른 테이블에 남성 신자들과 앉아 있던 그 사제의 목소리가 갑자기 귓가에 내리꽂혔다. 여기 앉힐까? 저 체크무늬? 그 체크무늬는 마치 술집 여자를 불러내는 듯한 태도에 얼어붙었고 말았고, 그 말을 그냥 못 들은 척했다.

알고 보니 그 사제는 다른 날에 다른 여성 신자를 성추행했었고 결국 우리 본당에서 임기를 다 못 채우고 잘렸다. 체크무늬는 피해 여성이 진술 자료를 모을 때 충실하게 협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찜찜함을 털기로 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술자리에 함께 있던 남자 차장이 갑자기 러브샷을 하자며 내게 팔을 뻗어왔다.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딴은 내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의 팔이 내 오른팔을 감아 들어왔고 이어서 머리 뒤로 술 삼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론계에 몇 년간 몸을 담고 나니 그날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이 업계에서 러브샷은 반가움, 혹은 미안함이나 애틋함의 표시였다. 이후로도 별의별 술자리에서 러브샷은 이어졌고 나는 그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당시의 일을 문제 삼지 않았던 스스로가 대견했다.

타사 동료들 몇몇과 함께 나름 높으신 취재원을 만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귀갓길이 비슷해 그와 같은 택시를 탔다. 집에 가는 30여 분간 그 50대 남성 취재원은 당시 20대였던 내게 수차례 ‘기자님 젊고 너무 좋다’ ‘기자님 예쁜 거 아시죠’ 류의 개소리를 반복했다. 나는 잠시 ‘이거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 취재원이 바로 경찰관이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나는 내가 뭘 겪을 때마다, 지금 당장은 어렵더라도 똑바로 살아서 이 다음 세대의 여자들은 다른 세상에 살게 하겠노라 막연한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피로했다. 나도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철 없고 치사한 청년들처럼 그냥 알량하게 살고 싶었다.

왜 여자들은 똑바로 살아야 하나. 왜 자꾸 뭘 당해서 갈등 끝에 이내 억울함을 삼켜야 하나. 뭘 증명하거나 자기 합리화해야 하나.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하나. 왜 이렇게 못살게 구나. 나도 그냥 일하고 돈 벌며 살고 싶다. 일상을 좀 안온하게 누리고 싶다. 늘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익숙한 공간에서 상처받으며 살았던 우리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투쟁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나.

그러는 동안 강남역에서 여자가 죽고, 유명한 여자들이 목숨을 끊고, 누군지 모를 여자들이 N개의 채팅방에서 벗거나 피 흘리는 채로 나뒹굴다 발견됐다. 그리고 이제는 딥페이크다. 세상에 묻고 싶다. 정말 텔레그램이 문제인가. 나는 텔레그램이나 딥페이크 기술이 디지털 성폭력의 확산에 어떤 식으로 기여했는지 하등 관심이 없다.

내 선명하고도 해묵은 관심은 어째서 학생이건 교사건 군인이건 여자들이 훨씬 더 많이 당했느냐에 있다. 나는 남자들이 정말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인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단 하나의 절대 새삼스럽지 않은 진실은, 실질적 피해자로 살아가는 여자들이다.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큰 조카가 내년에 고등학교에 간다. 나는 요새 그 아이의 얼굴이 가상의 몸에 합성된 장면이 문득 상상되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안 해서 그 애들이 이런 일들을 당하고 있는 걸까 봐 무엇보다 두렵다.

우리 세대의 여성들이 삶의 궤적에서 겪어 왔던 크고 작은 성폭력들을 모두 바로잡아 왔다면 오늘날의 풍경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을까. 내가 그 차 안의 성폭력범을 신고했더라면, 이 업계의 관습이 실은 악습이다 목소리 냈더라면 뭐라도 달랐을까. 나는 이제 그 아이들이 제발 바바리맨만 만났으면, 어른들한테만 뭘 당했으면 하고 바랄 지경이다. 난 적어도 한 교실을 쓰는 남학생들이 무섭지는 않았다.

우리 시절 접했던 ‘디지털 성폭력’이란 남자친구에게 성관계 장면을 불법 촬영 당한 뒤 남성 친구나 형제로부터 피해 사실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수많은 여자가 목숨을 끊었다. 가상의 사진물이라고 해서 부디 딥페이크 피해 여성들의 모욕감이 축소 해석되지 않기를 바란다. 영문도 모른 채 복사뼈를 간수하며 사는 여중생들의 오래될 울분에 대해 이 사회는 아는 바가 너무 없다.


[소소칼럼]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소소한 취향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글입니다. 소박하고 다정한 감정이 우리에게서 소실되지 않도록, 마음이 끌리는 작은 일을 기억하면서 기자들이 돌아가며 씁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