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올해 대한민국에 부는 ‘셰익스피어 열풍’ 짧은 콘텐츠 범람 속 ‘4대 비극’ 인기 강력한 서사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 동시대 사연 압도하는 호소력 지녀 제작사 “작품성-관객 만족도 보장”… 조승우 등 배우도 ‘꿈의 무대’ 도전 18일 개막 ‘햄릿’ 전 회차 전석 마감… 정통연극 부활에 중장년층도 호응
《한국에 부는 ‘셰익스피어 열풍’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 400년도 넘은 셰익스피어 작품들이 책과 공연 등으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한국에선 특히 희극보다 비극이 인기라는데…. 최근 문화계 셰익스피어 열풍 현상을 짚어 봤다.》
올여름 ‘1000만 배우’ 황정민이 주인공 역을 맡아 화제가 됐던 연극 ‘맥베스’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욕망으로 인해 파멸에 이르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린다. 중세 스코틀랜드가 배경인 이야기는 현대적인 무대 세트, 긴장감 넘치는 음악 등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 연출돼 오늘날 관객을 사로잡았다. 샘컴퍼니 제공
대형 제작사들은 경쟁적으로 셰익스피어 희곡을 선보이고 나섰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도 대중성 높은 ‘햄릿’ ‘맥베스’ 같은 작품들은 캐스팅에 힘을 실어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올여름에는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황정민 주연의 ‘맥베스’가 공연돼 화제를 모았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공연제작사 샘컴퍼니가 제작을 맡고 송일국과 송영창이 주요 캐릭터인 뱅쿠오, 덩컨 역을 각각 연기했다. 이달 1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약 3개월간 공연됐던 ‘햄릿’은 뮤지컬 ‘시카고’ 등을 만든 신시컴퍼니 제작으로 전무송, 이호재, 박정자, 손숙 등 연극계 거목들이 대거 출연했다.
● 내면 방황하는 주인공, 불안한 현대인에게 호소
왜 지금 셰익스피어일까. 전문가들은 셰익스피어가 여전히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를 그만큼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현대 문화 속에서 찾았다.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자극적인 콘텐츠 속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친숙한 이야기를 반복해 음미하고 싶은 정반대의 욕구를 무대 예술이 해소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 속 주인공들은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진 가운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인물로, 오늘날 기후 위기, 정치 투쟁, 기술 발달 등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갖는다”고 했다.
셰익스피어 희곡은 ‘드라마의 정수’로 불릴 만큼 서사의 기승전결과 갈등 구조가 뚜렷하다. 19세기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 등이 일상성을 앞세우는 것과 대비된다. 주인공들은 내면의 극심한 방황을 겪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 간다.
‘포스트드라마’(문학성이 아닌 현장성, 상호작용 등에 중점을 둔 연극 사조) 기조가 시들해지면서 “이야기가 있는 연극으로 회귀하자”는 관객의 요구가 거세진 것도 셰익스피어 재소환과 연관이 깊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국내 연극계가 10여 년간 연극성 강화에 집중하면서 이야기의 힘이 약해졌다”며 “관객이 셰익스피어를 다시 소환하는 건 드라마가 있는 연극을 갈구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나 미투 사태 이후 한동안 관객과 창작자 모두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급선무였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드라마 연극에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영향도 있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 4대 비극, 제작사·배우에게도 ‘꿈의 작품’
명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유명한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독살된 선왕의 원수를 갚으면서 겪는 선악의 고뇌를 극적으로 담아냈다. 신시컴퍼니 제공
실제로 약 한 달간 공연됐던 황정민 주연의 ‘맥베스’는 유료 객석 점유율 99%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모았다. 티켓 최고가가 11만 원으로 연극 입장료 기준 고가였음에도 약 1200석 규모 객석이 가득 찼다. 이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기준 올해 상반기(1∼6월) 연극 장르 티켓 예매 수가 전년 동기보다 1.5% 감소한 추세와 대비된다.
● 익숙한 정통 연극에 극장에 돌아오는 중년층
최근 공연되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은 원작 서사는 충실히 따르되 시대착오적 요소는 시대에 맞게 다듬는다. 전근대적인 대사, 캐릭터를 줄이고 배경 설정을 현대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올 7월 공연된 국립극단 ‘햄릿’은 성차별적 요소를 대거 들어냈다. 햄릿을 해군 장교 출신 공주로 설정했고, 상대역 오필리아는 기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꿨다. 여성 비하적 대사도 뺐다. 부새롬 연출가는 “성별을 넘어 단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작품의 본질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고 각색 의도를 설명했다.
올 6월 공연된 국립극장 기획 연극 ‘맥베스’도 시대적 배경을 각색했다. 원작 속 중세 스코틀랜드 왕족의 이야기가 정육점을 운영하는 오늘날 한국의 가족 이야기로 재창작됐다. 예술의전당 공연기획부 관계자는 “고전은 검증이 끝난 작품이라 관객에게 쉽게 어필한다”며 “‘익숙한 원작을 어떻게 변주했는지’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로 작용한다”고 했다.
셰익스피어 원작에 충실하면서 고전미를 살린 정통 연극에는 전 세대가 고르게 반응했다. 신시컴퍼니 ‘햄릿’은 젊은층은 물론이고 중장년층 관객에게도 사랑받았다. 인터파크티켓에 따르면 예매자 중 40, 50대 비율이 48%에 달해 20, 30대 비중(41%)을 넘어섰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는 “최근 공연된 셰익스피어 작품 중 가장 정통 연극에 가까웠고, 중장년층에게 인지도 높은 출연진이 많았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 정통 연극 트렌드가 확산되면 그동안 극장에 발길이 뜸했던 중장년층 관객까지 돌아오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