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2021년 7월 당시 야권 대선 주자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서구의 한 식당을 방문해 지역 국회의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건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대한민국은 술 권하는 사회라고 한다. 103년 전 작가 현진건이 쓴 <술 권하는 사회>에선 일제 강점하 식민지 지식인들의 고뇌와 허탈함 등이 담겨 있었다. 2024년 현재에는 ‘N포 세대’, ‘헬조선’ 등으로 대표되는 희망 없는 한국 사회가 술을 권하는지도 모른다. 술은 고된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잊고 다시 내일을 향할 수 있게 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친 음주는 오히려 사고와 더 큰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추석 명절에도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기분좋게 음복을 하고 오랜만에 친지들과 술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헤어지면 괜찮은데 꼭 과음한 이가 나타나 부적절한 언행으로 분위기를 망치기도 한다. 가뜩이나 음주운전과 각종 사고 등 지나친 음주문화로 인한 폐해가 끊임없이 뉴스를 장식하는데… 요즘 정치권에선 유독 대통령의 음주에 관심이 많다.
● ‘술 취한 선장’ ‘만취 운전’ 등 프레임 씌우는 야권
8월 2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를 예방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도 7월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출마 선언을 하면서 “윤석열 검찰독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고속도로를 ‘만취 상태’로 운전한다”며 “자동차도, 가름값도, 심지어 술값까지 모두 세금”이라며 ‘탄핵’을 주장했다.
이처럼 야권은 대통령을 이른바 ‘주취자’ 취급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애주가지만 두주불사(斗酒不辭)로 유명하다. 술을 많이 마셔도 웬만하면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이 세다는 것이다. 검사 시절에도 새벽까지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지각을 하거나 업무를 ‘펑크’낸 적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이는 야권의 프레임 씌우기다. ‘검찰 독재’, ‘친일 정권’ 등을 끊임없이 반복해 외치며 현 정부를 몰아가듯 윤 대통령의 이미지에 프레임을 씌우고 흠집을 내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물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똥볼 차기’로 끝나기도 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 등이 앞장서서 유포했던 ‘계엄령’ 논란은 야권 내부에서조차 “너무 나갔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 文, 재임 시에도 소주-고량주 즐겨 마셔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동포간담회에 참석해 건배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동아일보DB
“문 대통령은 여전히 저녁식사 때 반주로 ‘빨간 뚜껑’ 소주(참이슬 오리지널)를 많이 마신다. 프리미엄 소주인 화요도 종종 마신다. 작은 연태고량주 1병이 모자라면 소주 한 병 정도 더 마시고 가끔 와인도 마신다.”
- 취재 메모 중 -문 전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로 선출된 2015년, 당 출입 말진 기자들과 오찬간담회에서 필자도 문 전 대통령에게 소주를 따른 기억이 있다. 반주로 술을 즐겼던 문 전 대통령에 대해 정치권이 문제를 삼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정봉주 전 의원이 2004년 총선 이후 친노 정치포털사이트 ‘서프라이즈’에 띄워놓은 ‘청와대만찬 감상기’의 일부다. 정 전 의원은 당시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끌려가야 할 노래가, 이제 국회의원들의 입을 통해 대한민국 한복판에 울려 퍼지게 될 줄은…. (중략) 포도주에 다소 취기가 올라 보이는 대통령도 모든 당선자도 울고 있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서 역사는 새로 쓰여지고 있음을 선언한 5월 29일! 민주화운동세력, 개혁세력이 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음을 확인시켜 준 자리였다.”
- 2004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로 내려간 뒤엔 막걸리를 즐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데다 젊은 시절 건강이 좋지 못했던 탓이라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는 건 좋아하며 자신의 순서가 되면 동료 참석자에게 ‘백기사’를 부탁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시바스 리갈’ 등 위스키를 즐겨 마신 걸로 유명하다.
● 유독 尹에게 엄격한 잣대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 경축 연회에서 건배주를 마시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동아일보DB
윤 대통령은 과거 검사 시절엔 위스키와 맥주의를 섞은 ‘양폭’을 즐겼지만 ‘소맥’이 유행한 뒤로는 소맥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여권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대통령은 와인, 사케 등은 안 먹고 소맥을 제일 좋아한다. 와인을 마시면 다음날 컨디션이 안 좋은데 소맥은 뭐 잠도 잘오고 다음날 머리가 가볍다고 하더라. 당선인 시절 한 번 우리 집에 와서 가장 비싼 와인하고 샴페인을 꺼내왔는데 입에 안 대더라. 조금 이따가 갑자기 ‘소주 있어요?’라고 하더라.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좀 말아봐’하더니 소맥 폭탄주 말기 시작해서 자정까지 먹었다.”
- 취재 메모 중 -당초 윤 대통령은 ‘혼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인관계가 좋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혔던 만큼 밥과 술을 함께하며 소통하겠다고 표방한 것이다. ‘혼밥’을 많이 했다는 전직 대통령과 대비되려는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요즘에는 술을 마셔도 일부러 도수가 낮은 맥주만 마신다고 한다. 자신을 향한 과도한 공격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기대보다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라고 한다면, 또는 의대 정원 확대 등 구체적인 정책 방향이 잘못됐다고 비판한다면 이는 감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거 없이 ‘만취’ 상태로 국정을 이끌고 있다고 비난한다면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칠 뿐이다.
대통령의 음주는 죄가 아니다. 이를 근거로 탄핵을 운운하는 건 좀스럽기 그지 없다. 대통령의 과음이 문제라면, 야권은 정권교체 뒤에 매일 아침 대통령의 혈중알코올농도를 공개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던가, 아니면 차라리 대통령이 재임기간 금주하도록 하는 ‘술취한 선장’ 방지법이라도 발의하는 게 나을 것이다.
용산 대통령실에 출입하는 필자에게 주변에서 많이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요즘도 대통령이 술을 많이 마시느냐’였습니다. 술은 체질적으로 잘못 마시는 사람이 많이 마시다가 음주운전이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알코올 중독이라면 문제지만 업무시간이 끝난 뒤에 공식행사 또는 개인 일정으로 주량껏만 마신다면 그걸 마냥 비난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정치가 실종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만나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을 마시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경색된 여야관계를 풀 수 있다면, 제발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 국민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주가’ 이미지는 득보단 실이 많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자중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미운 남편이 술까지 먹고 들어오면 더 밉다고 하지 않나요.
하지만 야권도 이중잣대와 프레임 씌우기에 집착하면서 ‘술 취한 선장’ 운운하며 국격을 훼손하는 일은 좀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부족하니만 못한 법입니다.
지금처럼 정치가 실종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만나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술을 마시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경색된 여야관계를 풀 수 있다면, 제발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주요 의사결정에 대해 국민들이 불안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주가’ 이미지는 득보단 실이 많을 것입니다. 앞으로 더 자중할 필요성이 있겠지요. 미운 남편이 술까지 먹고 들어오면 더 밉다고 하지 않나요.
하지만 야권도 이중잣대와 프레임 씌우기에 집착하면서 ‘술 취한 선장’ 운운하며 국격을 훼손하는 일은 좀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부족하니만 못한 법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