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의자에 앉은 채 탁자에 몸을 엎드리고 있다. 깜박 잠이 든 걸까? 잠시 쉬고 있는 걸까?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하다. 창문 커튼이 닫혀 있는 걸로 보아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거나 늦은 밤으로 보인다.
‘지친(1895∼1900년·사진)’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 화가 라몬 카사스가 서른 즈음에 그린 그림이다. 그는 카탈루냐 모더니즘 미술 운동을 이끈 주요 화가로 역사적 사건을 다룬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초상화나 일상생활을 묘사한 장르화에도 뛰어났다.
이 그림은 그의 장르화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가는 모델의 자세와 분위기를 통해 피로에 지친 인물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빛이 들지 않는 실내, 아래로 무겁게 떨어뜨린 검은 머리, 힘없이 쭉 뻗은 두 팔, 기도하듯 깍지 낀 두 손 등 여자의 모습에서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 소진까지 느껴진다.
카사스가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 스페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쿠바 독립전쟁과 이후 이어지는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스페인 내에서도 정치적 불안과 분열이 심화된 시기였다. 나라가 불안한데, 국민들의 삶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카사스는 사회적 문제를 작품에 곧잘 반영했기 때문에 이 그림 역시 그 시대 사람들이 느끼는 피로감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시대의 무기력하고 우울한 자화상인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저 여인이 살았던 120여 년 전의 삶과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고단하고 힘들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편한 인생과 힘든 인생은 분명 존재하겠지만. 불공평하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