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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9월 21일 고구려, 형제의 분열로 멸망하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입력 | 2024-09-18 23:00:00


고구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화합을 당부했으나 결국 형제들 사이의 반목으로 멸망했다. SBS 사극 ‘연개소문’ 화면 캡처

이문영 역사작가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당 태종의 거센 공격도 물리쳤던 고구려는 668년 9월 21일에 멸망했다. 평양성이 당나라에 함락되었다. 이적은 평양성을 한 달이나 포위 공격했다. 이때 신라 역시 군대를 동원해 공격에 나섰다. 신라군은 7월 16일 한성에서 출발했고, 평양 인근의 사천에서 장군 김문영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이어 신라군도 평양성 포위 공격에 합류했다. 신라군은 평양성 성문 공격 등에서 전공을 세웠다.

동북아의 패자를 자랑하던 고구려는 어떻게 평양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나. 그것은 내분 때문이었다. 고구려를 철권 통치한 연개소문이 죽고 나서 권력은 그의 장남 연남생에게 돌아갔다. 연남생은 이때 30대 초반이었다. 아홉 살 때부터 관직을 받아 후계자의 존재감을 드러낸 연남생이었지만 실적은 별 볼 일 없었다. 스물여덟 살 때 압록강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는데, 당군에 대패해 3만 군사를 잃어버렸다. 이때 연개소문이 사수 전투에서 당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고구려의 멸망은 좀 더 일찍 올 수도 있었다.

연개소문은 죽을 때 자식들에게 “너희들 형제는 고기와 물과 같이 화합하여 작위를 다투는 일은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이웃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은 화합하지 않았고 이웃의 웃음거리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말아먹기에 이르렀다. 연남생은 당나라와 화친하고자 했다. 연개소문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어진 마당에 호전적인 당나라와 맞서기가 두려웠을 수 있다. 그를 위해 고구려 태자를 당에 보내 당 고종의 태산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했다.

형의 이런 행동을 두 동생 연남건과 연남산은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들은 연남생이 지방 순시를 나갔을 때를 노려 평양을 장악하고 연남생의 어린 아들 연헌충도 죽였다. 연남생은 지방 세력을 규합해 평양 탈환을 꾀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연남생은 당에 토벌군을 요청했다. 당은 처음에 연남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연남생이 재차 사신을 보내고 결국 아들 연헌성까지 보내자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남생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국내성 등 여섯 개의 성을 바탕으로 당군과 연합전선을 펼쳤다. 당 고종은 연남생을 길잡이로 삼고,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고구려 정벌군을 발진했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고구려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신라에 투항했다. 연정토는 보장왕의 부마이기도 했으니 고구려의 멸망은 이제 머지않은 셈이었다. 연남생은 당에 들어가 당 고종을 알현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아들을 죽인 원수인 동생들과 화해할 길은 없었다. 고구려는 2년 가까이 항전을 거듭했다. 보장왕과 연남산이 항복한 뒤에도 연남건은 평양성에서 버텼다. 하지만 내부에서 연남생과 내통한 배반자가 나와 결국 평양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연개소문이 유언을 남길 만큼 형제들의 반목이 이미 심했는데도 연개소문은 현명한 사람에게 국정을 맡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감히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국정의 대계를 살피지 않은 결과,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당나라 오지로 끌려가는 비극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이문영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