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경제가 만난 사람] 심대용 동아대 전자공학과 교수 SK하이닉스 임원 시절 HBM 초기 제품 담당 “삼성 못잡아 고민, 과감한 공정 혁신으로 극복” “차세대 HBM 시대, 대만 TSMC 종속은 우려, 삼성-SK-소부장 손잡고 K생태계 키워야”
2015년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에 요구한 주문이다.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가속기 개발에 갓 뛰어들며 자사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뒷받침할 고성능 메모리가 필요한 시기였다. 엔비디아는 고대역폭메모리(HBM)만이 답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문제는 메모리업계에서 봤을 때 사업성이 전혀 가늠이 안 됐다는 점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모두 HBM이 전체 D램 생산량의 1%도 채 안 되던 시절이었다.
SK하이닉스는 ‘만년 메모리 2등’이란 딱지를 뗄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개발에 공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일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난 심대용 동아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기억했다. SK하이닉스 부사장 출신의 심 교수는 2016년 말 당시 ‘임원들의 무덤’으로 불리던 HBM 사업 담당 상무로 발령이 났다. 박사학위를 딴 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팔팔한 심 박사가 해결해 보라”고 보낸 것이다.
●“속도·전력·발열 삼박자 잡자 날았다”
심 교수가 고민한 끝에 고안한 해결책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접근법이었다. HBM에서 데이터가 오가는 구멍을 한 번 더 뚫자는 것이었다. HBM은 데이터 처리에 특화된 D램 8~12개를 수직으로 쌓아서 속도를 극대화한 메모리다. 이때 실리콘관통전극(TSV)이라는 기술을 활용해 D램들을 연결한다. 심 교수가 내놓은 방법은 D램 간 구멍을 뚫는 TSV를 두 배로 적용해 연결통로도 두 배로 확장하자는 것이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속도뿐만 아니라 전력효율도 크게 개선시켰다. 기존에는 전력이 오갈 때 병목현상이 발생하며 일시적으로 HBM 성능을 떨어트리는 부작용이 있었는데 통로가 두 배가 되니 이러한 고민도 해결된 것이다.
문제는 양산 효율이었다. 심 교수는 “칩에 구멍을 더 뚫어야 하다 보니 전체 면적도 커지게 됐다. 회사 입장에선 웨이퍼 한 장으로 최대한 칩을 많이 찍어야 비용이 절약되므로 면적이 10%만 커져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AI는 먼 미래 같았기에 내부 반대도 거셌다. 하지만 회사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하고 TSV 두 배 적용을 결정했다. SK하이닉스는 그렇게 HBM 2세대인 HBM2에서 확실한 인정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3세대인 HBM2E부터 시장 확대에 본격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가 이때 다진 HBM 경쟁력은 6년 뒤 빛을 발했다. 2022년 말 코로나19 이후 갑작스러운 과잉재고와 경기침체로 반도체 업계가 불황일 때다. 당시 챗GPT의 등장과 함께 AI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심 교수는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AI칩 붐이 일었고, HBM을 공급할 수 있는 곳은 SK하이닉스뿐이었다”고 했다.
심대용 동아대 전자공학과 교수가 2020년 SK하이닉스 임원 시절 구성원들로부터 받은 상패.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감사의 의미를 담아 수여했다. 심대용 교수 제공
●“TSMC 종속 위험, 한국 생태계로 접근해야”
심 교수는 “SK하이닉스로서도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TSMC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면 우리가 반대로 종속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삼성과 SK는 HBM에서는 경쟁자이지만 파운드리에서는 협력할 수 있기 때문에 묘안을 찾아야 한다”며 “여기에 대규모 투자도 필요한 만큼 정부가 적극 지원해 생태계 구축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현익 기자 bee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