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퇴직… 이런 세상이 있었네?”[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 2024-09-21 01:40:00

[이런 인생 2막]
삼성그룹 정년퇴직 이종섭 씨
35년 홍보맨 마치고 60부터 자아찾기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해도 바빠요”
아침부터 밤까지 공연 삼매경
월 30만 원에 매일 공연 보는 비결




자유롭게 연습 중인 아마추어 연극인 모임 ‘정통연극연구소’ 회원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퇴직한 뒤 꼭 일해야 해? 그냥 좀 쉬면 안돼?’

그간 주변에서 이런 질문들이 적지 않았다. 퇴직 뒤에도 사회적 의미를 찾거나 생계에 보태기 위해 바쁘게 뛰는 선후배들을 보며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찾아봤다. 좀 느긋하게 ‘노시는’ 분은 없으려나? 유튜브 ‘퇴직학교’ 채널에서 발견한 이종섭 씨(61)가 비슷해보였다.

삼성그룹 홍보분야에서 35년간 일하고 지난해 7월 정년퇴직한 그는, ‘매일 공연보는 남자’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무대 삼매경에 빠져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는 원칙하에 분주한 그의 퇴직후 1년 이야기를 들어봤다.

● 매일 공연 보는 남자

10일 오후 서울 성북구 보문동 성북50플러스센터의 한 강의실. 50~70대 남녀 6명이 모여앉아 돌아가며 대본을 낭독한다. 매주 화요일 모인다는 아마추어 연극인 모임 ‘정통연극연구소’다. 첫 대본읽기라 역할 상관없이 한줄 씩 돌아가며 읽는다. 한참 읽어가다가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대본만 읽어서는 무슨 메시지인데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게요. 몇 번 읽어봐야 할 것같아요.“

이종섭 씨는 이 모임 총무다. 지난 봄 이곳에 개설된 연극 수업에서 만난 멤버들이 4월 ‘택시 드리벌’이라는 20분짜리 연극을 무대에 올렸고, 헤어지기 아쉬워 모임을 이어가기로 했다.

‘매일 공연보는 남자’. 자신의 블로그 제목처럼 그의 하루는 공연으로 시작해 공연으로 끝난다. 매일 아침 블로그에 전날 본 공연에 대한 리뷰나 새로운 공연정보, 할인정보 등을 올린다. 가끔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에세이 형태로 쓰기도 한다. 오후에는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저녁에는 공연을 보러 간다.

“종일 제가 좋아하는 일정으로만 짜여 있죠. 이중 제가 직접 해본 분야가 연극이었습니다. 근 석달 간 수강생 모두가 노력해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저로서는 꿈이었던 연극 무대에 서 본 것이 제 퇴직 후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연극 ‘택시 드리벌’을 공연한 멤버들과 함께. 이 씨는 극에서 택시운전수 역을 맡았다. 이종섭 씨 제공



35년만의 자유

택시 드리벌 공연 당시의 포스터. 이종섭 씨 제공

그는 직장생활 35년 대부분을 홍보쪽에서 일했다. 기자들을 상대로 회사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이다.

―만 60세로 정년퇴직하셨으니 직장인으로서 천수를 누린 셈이네요.

“퇴직할 때 둘러보니 입사 동기(1988년)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어요. 드문 케이스죠.”

불완전 연소감에 시달리는 퇴직자들이 적지 않은데 비해 그는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치 군대나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 같았다. 말하는 내내 회사 밖 세상을 ‘사회’라고 표현하는 것도 공교로웠다.

―퇴직 당시 심경은?

“정년 6개월 전부터 보직을 내려놨습니다. 회사가 배려를 해 준 거죠.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내가 하루 세끼 밥은 먹을 수 있을까. 누구랑 어떻게 놀지, 내가 명함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정해진 날 들어오는 월급이 없어진 상태에 대한 두려움…. 퇴직한 분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어린 시절로 돌아가 지금까지 살아온 걸 돌이켜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어릴 때 기억들을 소환한 것이 도움이 됐다. 초등학교 소풍 때 앞에 나가 사회 보고 오락 담당하고 노래하고 춤추던 기억이 가장 즐겁게 떠올랐다. 여기에 퇴직을 석 달 앞둔 무렵, 난생 처음 본 뮤지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창작 뮤지컬 ‘영웅’을 보게 됐는데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역시 내 길은 저런 무대, 혹은 그런 걸 즐기면서 사는 삶 아닐까. 그때부터 수시로 공연을 보고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연장 가는 것 자체가 즐거웠어요. 예약하면서도 너무 짜릿했고 공연을 기다리고 공연장 가서 티켓 발급받는 그런 과정들이 너무 설렜습니다. 그러면서 ‘이 길이다’라고 깨달아나간 거죠.”

―그 전에는 공연을 본 적이 없나요?

“직장생활 35년 동안은 없어요. 영화 정도는 봤지만 연극 뮤지컬 오페라 발레 같은 건 거의 못 봤죠. 홍보 생활이라는 게 수시로 터지는 이슈에 대처하는 거잖아요. 주말이고 주중이고 문화생활은 불가능하죠.”

“퇴직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한다”는 이종섭 씨는 요즘 평생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 속에 행복하다고.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지망하던 방송사보다 먼저 삼성그룹 시험에 붙었다. 첫 근무처는 삼성항공. 6개월 정도 영업에서 일했는데 홍보 쪽에서 일하던 동기가 “홍보할 사람이왜 거기 가 있느냐”고 했다. 그가 입사동기 같은 차수 200명 중 ‘학습부장’(오락부장)을 맡아 ‘잘 노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끼’가 있다고 말한다.

“성동50플러스에서 들은 강좌 중에 적성 검사가 있었는데 ‘예술 지향’이 엄청 강하게 나왔어요. 검사를 하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조사한 중에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죠. ‘끼’가 데이터로도 증명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죠.”

―퇴직 후에도 일을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나이 60에 일을 그만두는 건 너무 빠르다는 우려도 해 봤고, 35년간 종사해온 홍보와 마케팅의 경험을 살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란 걸 찾고 나서는 홍보는 과감하게 접어버렸습니다. 퇴직 초기 취업을 해볼까 해서 공연 분야에 이력서를 내보기도 했는데 절 찾는 곳은 없더군요. 현재는 취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돈을 안 벌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으신 건가요?

“이 부분은 와이프에게 감사할 일이죠. 제가 퇴직 후에 물질적으로 집에 도움을 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와이프는 당연한 듯이 ‘그런 생각할 필요 없다, 당신 좋은 거, 하고 싶은 일 하라’고 하더군요. 그 한마디가 제게 엄청난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와이프를 믿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들 다 키웠고 부부 생활비 말고는 돈 들어갈 곳도 없어요.”

지난해 퇴직에 즈음해 가족이 만들어준 축하 팻말. 이종섭 씨 제공


● “퇴직 전 가장 큰 걱정은 부인과의 소통”

그는 부인과 단둘이 산다. 1남1녀 자녀들은 모두 출가했다. 퇴직할 때 가장 큰 걱정은 부인과의 소통문제였다고.

―어떻게 해결했나요.

“대화가 달라졌습니다. 요즘은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한시간 가까이 대화를 하는데 전에 없던 일이죠. 그 한시간 동안 저는 전날 공연장에서 만난 사람들, 또 공연장에서 있었던 일, 공연 내용 등을 시시콜콜 얘기해줍니다.

제 화법도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주로 ‘남 탓’ ‘아내 탓’ 하는 화법이었다면 지금은 제 얘기 위주로 해요, ‘모든 잘못과 원인은 나한테 있다’는 전제를 까는 거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는 내가 부족했다’거나 ‘내가 방법을 잘 몰라서 그런 거 같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지?’라고 오히려 와이프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가장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제일 소중한 아내와의 소통 문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의외로 퇴직 후 배우자와의 관계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대화방식 변화는 어떻게 터득한 건가요?

“어딘가 강좌에서 배운 것 같습니다. 퇴직 후 남자들이 참 많이 변하고 있고 변할 수밖에 없어요. 제 또래 동창이나 회사 퇴직자모임 같은 데 가면 한결같이 듣게 되는 얘기가 ‘우리는 영식님이 돼야 한다’는 거예요. 하루 세끼 먹는 ‘삼식이’, 두끼 먹는 ‘두식이’가 아니라 밥을 오히려 해서 바치는 ‘영식님’이죠. 지금까지 밥을 얻어먹었으니 이제는 내가 앞치마 두르고 밥을 해서 와이프에게 줘야 한다는 얘기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집안일 거의 안 했거든요. 지금은 아침에 밥은 집사람이 해주지만 저도 청소하고 분리수거하고 설거지도 합니다. 역할분담은 굳이 안했지만 가사의 절반 이상은 제가 하는 것같아요.”

● 가성비 공연 관람 노하우 대방출

이 씨가 올해 보고왔다는 공연 표들. 할인 노하우를 이용해 회당 평균 1만 5000원 안팎의 비용이 들었다고.

그는 두 달 전부터 국민연금을 2년 당겨 수령하고 있다. 그 돈으로 자신의 생활비와 용돈을 충당한다. 이중 공연에는 월 30만 원 정도를 쓴다고.

―공연을 그렇게 많이 보는데 그 돈으로 가능한가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 티켓꾸러미를 가방에서 꺼냈다.

“올초부터 8월까지 관람한 표들이예요. 146회를 봤어요. 연극이 제일 많지만 오페라나 발레, 뮤지컬도 있어요. 올해 쓴 공연비는 월평균 27만 8000원입니다. 회당 1만5000원 안팎이죠.”

―오페라나 뮤지컬은 비쌀 텐데요.

“오페라 R석은 몇십만원도 하죠. 다만 좌석 등급이 낮은 건 1, 2만 원대 표도 있어요. 예술의 전당이라면 4층에서 보는 게 제일 싸죠. 전 그런 자리에서 봐요. 망원경을 사용하면 1층에서 보는 것보다 더 선명하거든요.

블로그에는 1, 2만 원짜리 시야에서 본 관람 후기를 올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도 돈 없어도 오페라를 즐길 수 있겠구나’라고 용기를 얻는 분이 생기죠. 돈 없이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편에서 감상을 적어주고 또 그런 티켓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소상히 알려드립니다.”

연극 관람 뒤 관객으로서 출연진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종섭 씨 제공


―할인 노하우를 좀더 소개해 주신다면.

“일단 어떤 공연이 있을지 꿰뚫고 있어야 돼요. 모든 공연은 오픈 날짜에 맞춰 예매하면 조기 예매 할인을 해줍니다. 또 공연 끝나기 일주일 정도 전부터는 ‘막공 할인’에 들어갑니다. 보고 싶은 공연인데 돈이 없다면 그걸 기다리는 거죠.

대학로 공연 전문 사이트들은 대부분 50%~70% 할인해줍니다. ‘플레이 티켓’ 사이트의 경우 할인은 기본이고 무료 공연이 항상 4~5개는 있어요. 무료인데 예약만 하면 됩니다.

또 성남아트센터나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거의 매달 ‘만 원의 행복’ 또는 ‘천 원의 행복’같은 이벤트를 합니다.

예술의 전당 국립국악원 등 유료회원가입을 하면 회비 이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연장도 많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통해 자세히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요. 문화가 꽃피는 곳에서 사회도 발전합니다.”

●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네”

―회사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 계세요?

“35년간 가족들을 먹여 살린 직장인데 감사하죠. 다만 회사를 떠난 느낌은 마치 알을 깨고 나가는 것 같은 해방감이예요. 나는 보이지 않는 큰 창살 속에서 정해진 시간을 살아냈다. 이제 나는 자유다… ”

―‘나와보니 이렇게 좋은 세상이 있었네’ 하면서….

“너무 좋아요. 이렇게 즐길 게 많고 그런 것들이 삶을 얼마나 활기차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지. 집사람도 무척 좋아하죠. 제가 돈은 안 벌어와도 항상 즐겁고 행복해하니까요.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이 다 글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어 하죠. 그렇다고 제가 몇백 만 원씩 쓰고 다니면 좀 짜증스럽겠지만, 한 달 30만 원, 그것도 자기 연금 받아서 쓰는데 뭐라 하겠습니까?”

지난 5월 연극강좌 수강생들이 극단을 창단했다. ‘정통연극연구소’라는 이름은 지도강사가 명명했다고. 이종섭 씨 제공

-연극의 매력은.

“연극을 통해 내가 꿈꾸고 희망하는 또 다른 삶을 무대에서 구현해 볼 수 있다는 것, 오랜 과정을 거쳐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때 느껴지는 희열,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사실 설 수 있는 무대가 있든 없든 내가 이 루틴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또 다른 다양한 삶을 살아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매력인 것 같습니다.”

-동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가를 찾으시라고, 만약 찾았다면 그 일을 주저 없이 과감하게 밀어붙여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경우 두가지가 도움이 됐습니다. 첫째 자신의 과거 모습으로 돌아가보는 것. 어머니께 한번 여쭤보세요. 내가 정말 뭘 좋아했는지. 둘째 좀 돈을 들이더라도 자신의 성격 분석을 한번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 연극과 봉사 병행하는 삶이 목표

―앞으로 계획은.

“오늘 연습하던 분들과 내년 경기도 용인에서 열리는 시민연극제를 목표로 무대를 만들 계획입니다. 연극 지도하는 강사님을 모시고 5060세대의 순수한 극단을 만들어보려 해요. 연극 강의를 할 준비를 하고 관련 책을 쓰려고 출판 과정에 대한 교육도 받고 있습니다. 또 청소년 상담 봉사를 하기 위해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극과 봉사를 병행해가고 싶습니다.”

청소년지도사 자격증 합격자들과. 이종섭 씨 제공

―청소년상담에 관심 가지는 이유가 있나요.

“제 청소년 시절의 경험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 다녔는데 너무 심하게 빠져들었습니다. 누구 하나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인생의 방황기에 누군가가 나를 잡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번에 아동센터 가서 어린 친구들하고 얘기해보니 길 밖의 청소년들이 너무 많고, 도움이 필요한 곳도 무척 많습니다.”

그의 블로그 프로필에는 ‘허당완보’ 라는 호와 함께 이런 자기소개가 올라와 있다. 35년/ 직장생활을 끝내고/ 인생 2막/ 남은 인생을/ 어릴 적 꿈이었던/ 노래와 춤 몸짓/ 공연과 함께 합니다/ 나의 묘비명에/ 이렇게 씁니다/ 한평생/ 공연을 즐기고 나누며/ 행복했어요. 안녕~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