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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빅컷’에 日경제 버팀목 ‘엔저’ 흔들… 디플레 탈출 늦어질까 우려[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4-09-21 01:40:00

엔저 시대 저무나
美 금리인하 전망에 7월부터 엔 강세… 엔-달러 환율, 160엔대서 140엔대로
고물가 우려한 日 시장 개입 영향… 경제 전반은 오랜기간 엔저에 익숙
수출-해외 관광객 증가 핵심 동력… 금융당국, 경제회복 ‘찬물’ 걱정
美 추가 인하 예고에 엔고 지속 예상… 글로벌 헤지펀드도 엔 강세에 베팅



20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가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날 BOJ의 기준금리 동결 발표와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BOJ 유튜브 캡처


반짝 변화일까. 엔저 추세가 완전히 바뀌는 걸까.

미국 달러, 유럽연합(EU) 유로와 함께 ‘세계 3대 기축 통화’로 꼽히는 일본 엔화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올 7월만 해도 엔화 가치는 달러 대비 160엔을 돌파해 1990년 이후 34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엔 약세).

이후 일본 정부가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을 단행하고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엔화 가치는 8월 들어 140엔대에 안착했다. 이달 16일에는 139엔대까지 떨어져 2023년 7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엔 강세). 엔화는 7월 이후 채 두 달도 안 돼 약 13% 떨어졌다.

18일 연준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리는 이른바 ‘빅컷(big cut)’을 단행하고, 추가 인하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중장기적으로 ‘강(强)달러’ 기조가 약화되고 엔 가치가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일본의 오랜 저금리로 세계 외환시장에서 잊혀지는 듯했던 ‘엔 강세’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다만 일본 금융당국은 최근의 엔-달러 환율 하락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눈치다. 30년 만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탈출을 염원하는 일본은 최근의 임금 인상, 물가 상승을 내심 경기 회복의 신호로 해석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엔 가치가 오르면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꺾이고 외국인 관광객 유입이 위축돼 겨우 살아난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장기 집권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내내 추진했던 아베노믹스, 즉 돈 풀기에 의한 경기부양 정책은 막을 내리고 있지만 엔저에 의존해 온 일본 경제가 체질 개선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오랫동안 엔저의 달콤한 맛에 취해 생산성이 갈수록 뒷걸음치는 딜레마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 됐다고 진단한다.

● 美 금리 인하가 엔 상승 이끌어

“엔화 하락 추세는 2024년에 끝날 것이다.”

지난해 12월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올해 세계 경제를 전망하면서 ‘핵심 주제(Top pick)’로 엔 강세(엔-달러 환율 하락)를 점쳤다. “일본은행(BOJ·일본 중앙은행)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마이너스 금리 체제에서 벗어나고, 다른 경쟁국들이 금리를 낮추면서 엔화 가치가 강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전망대로 일본 당국은 올해 들어 두 차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가장 큰 목적은 ‘슈퍼 엔저’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다. 엔저에 따른 물가 상승이 ‘디플레이션 탈출’을 넘어 과열이 걱정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올 3월 단기 정책금리를 연 ―0.1%에서 0∼0.1%로 올렸다.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난 건 2007년 2월 이후 17년 만이었다. 7월에는 0.25% 정도로 재차 인상했다.

금리를 올렸지만 엔저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기대는 어긋났다. 올 1월 달러당 140엔대에서 시작된 엔-달러 환율은 7월 10일 161.69엔까지 올랐다.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한 건 분명 중대한 조치였지만 엔화 상승 속도는 느렸다.

당시 미 기준금리는 5.25∼5.50%였다. 일본의 금리 인상에도 미국과의 기준금리 격차가 5%포인트에 달하니 엔 상승이 일어나기 어려웠다. 일본의 금리 인상은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던진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금리 인상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국은 4, 5월에 걸쳐 9조7885억 엔(약 91조 원) 규모의 달러를 팔아 엔화를 매수하는 외환 개입에 나섰다. 그래도 엔-달러 환율의 오름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랬던 흐름이 하반기 들어 바뀌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일본이 아닌 미국이었다. 연준의 금리 인하를 시사하는 각종 발언과 지표들이 나오자 미일 금리 격차가 좁혀질 것이라는 전망이 커졌다. 일본 당국 또한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5조5348억 엔(약 51조 원) 규모의 개입을 단행했다. 4, 5월의 첫 개입은 효과가 크지 않았지만 미 금리인하 전망이 가시화한 상황에서 단행된 6,7월 외환시장 개입이 거듭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외환시장의 가장 강력한 플레이어는 당국’이라는 오랜 명제가 확인된 순간이었다.

당시 개입을 진두지휘한 간다 마사토(神田真人) 내각관방 참여(전 재무성 재무관)는 아사히신문에 “시장에서는 달러당 180엔, 200엔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놔뒀으면 지금쯤 200엔을 가볍게 돌파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며 엔 약세 추세를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1992년 영국 파운드화 폭락 사태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 거물 투자자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가 100억 달러를 동원해 파운드화를 투매하면서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했고 영국 금융시장이 뿌리째 흔들렸다.

● 엔화 환율 하락, 자국 수출기업엔 악재

다만 일본 정부가 현재의 엔 강세를 마냥 반기는 것만은 아니다. 당국이 과도한 엔저에 잠시 제동을 건 이유는 환율 상승에 따른 수입 물가 상승이 소비자물가 오름세로 이어져 서민 경제를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엔저가 오랫동안 일본 경제 운용의 기본 토대였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환율을 높여 수출을 늘리고 외국인 투자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전략이다.

2012년 말 아베 전 총리가 두 번째로 집권한 후 강하게 드라이브를 건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금융 완화였다. 2012년 79.81엔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10여 년에 걸쳐 2배 넘게 올랐다. 도요타 등 간판 수출기업 실적은 크게 개선됐다.

한국, 중국 등에서 외국인 관광객 유입도 급증했다. 올 상반기(1∼6월) 일본 내 외국인 소비액은 3조9070억 엔(약 37조 원)으로 일본 반도체 및 전자부품 수출액(2조8395억 엔)을 웃돌았다. 중국 등에서 들어오는 부동산 투자 자본도 늘었다.

이는 일본 경제가 환율에 의존하는 구조가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장 원-엔 환율이 올 7월 100엔당 860원대에서 최근 950원대로 오르자, 한국인들의 일본 여행 경비 부담이 커졌다. 올 상반기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수 1위인 한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줄어들면 내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엔고에 따른 외국인 관광객 감소 우려로 일본의 대표 백화점인 미쓰코시이세탄의 주가는 최근 2개월 새 30% 넘게 하락했다. 일본 시가총액 1위 겸 최대 수출기업인 도요타 주가 또한 같은 기간 20% 이상 내렸다.

엔화 환율이 낮아지면 그만큼 일본 기업의 수출 가격이 높아져 기업으로서는 악재가 될 수 있다. 블룸버그저팬은 엔-달러 환율이 1엔씩 내릴 때마다 일본 기업의 경상이익이 0.4∼0.6%가량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금융위기 전 한때 110엔대였던 위기가 발생한 후 엔-달러 환율은 80엔대까지 떨어졌다. 이 같은 엔 강세로 일본의 주요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LG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2008∼2011년 일본 운수업종 기업들의 수익성은 전 세계 평균 대비 6.4% 하락했다. 화학(―4.3%), 전기전자(―2.6%)가 뒤를 이었다.

자산운용사 픽텟저팬의 마쓰모토 히로시(松元浩) 시니어펠로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달러당 130엔 중반까지 엔화 가치가 오르면 기업 실적 감소 우려가 본격적으로 반영돼 일본 주식은 다시 부상할 기회를 잡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일본 수입업체들은 엔 강세를 반긴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저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이들은 엔 강세로 수입 가격 부담이 줄어드는 것을 선호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쌀을 제외한 주요 식료품, 각종 공업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한다. 올 5월 메이지 야스다 종합연구소는 엔-달러 환율이 170엔까지 오르면 일본 수입 물가는 13.5% 치솟고, 물가를 반영한 실질 임금은 마이너스 상태를 이어갈 것으로 봤다.

● “당분간 엔 강세” 전망 우세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엔화 환율이 당분간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블룸버그는 엔 가치가 달러는 물론이고 호주 호주달러, 스위스 프랑, 중국 위안화 등 각국 주요 통화에 대해서도 상승세를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각국 헤지펀드들이 ‘엔 강세’에 베팅하고 있다고도 전했다.

이는 일본이 워낙 오랫동안 세계 주요국 중 가장 낮은 기준금리를 유지하면서 엔 약세가 장기화했기에 이에 따른 반등 여지도 그만큼 크다는 분석과 무관하지 않다. 리처드 프라눌로비치 웨스트팩은행 외환 전략 책임자는 블룸버그에 “엔-달러 환율이 향후 1∼3개월간 달러당 137∼138엔대로 떨어질 수 있다”며 추가 엔 강세를 점쳤다. 금융시장 일각의 전망대로 올해 안에 일본은행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경우 엔-달러 환율의 하락 폭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연준이 연내 0.5%포인트의 추가 금리 인하를 예고한 것 또한 엔 강세 전망에 힘을 더한다. 미국이 계속 기준금리를 내리는 상황에서 강달러 흐름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 같은 엔 강세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공포가 재연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제로(0)금리 수준의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 금리가 높은 미국 등의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뜻한다. 미국과 일본의 기준금리 격차가 좁혀지면 이런 투자의 매력이 낮아져 기존 투자를 거두려는 물량이 쏟아질 수 있다.

지난달 5일 일본 닛케이지수를 포함한 아시아 주요국 증시가 폭락한 이른바 ‘블랙먼데이’의 주요 원인 또한 일본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 미국 경기 침체 전망에 따른 달러 약세 전망이 야기한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 때문이었다. 다만 일본 당국이 어떤 식으로든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 있고, 금융시장 전반에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가능성이 널리 알려진 만큼 시장의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