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명예교수 자민당 총재 후보들 차이 안 커… 한일 관계, 美 요구로 개선돼 이시바-고이즈미, 한일 관계 중시할 듯… 다카이치, ‘국내용 내셔널리즘’ 강조 한국, G7 참여 필요… 역사 문제, 계속 배우고 귀 기울여야
19일 일본 도쿄대 연구실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명예교수. 그는 “한일 관계 개선은 미국의 강한 요구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며 “누가 차기 일본 총리가 되더라도 한일 관계를 중시하는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사실상 일본의 차기 총리를 뽑는 27일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는 향후 일본의 외교 안보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재임 3년간 주요 업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을 내세웠을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에 따라 누가 차기 총리가 되더라도 양국 관계가 지금보다는 소원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국제정치학자이자 한일 관계에 이해가 깊은 후지와라 기이치(藤原歸一) 도쿄대 명예교수는 차기 총리의 성향과 별개로 현재의 한일 관계 개선이 지속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19일 도쿄대 캠퍼스에서 만난 그는 “한일 관계의 토대가 약할지는 몰라도, 도전도 그다지 강하지 않다”며 “지금의 한일 관계 강화는 한일 양국 지도자의 신뢰 관계보다 미국 정부의 강한 요청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현실론을 내비쳤다. 후지와라 교수는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양국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릴 방안으로 “한국의 주요 7개국(G7) 참가를 일본 정부가 호소하자”고 제안했다. 자민당 총재 선거 이후 펼쳐질 한일 관계 등 동아시아 정세와 한미일 협력 등에 대해 들어봤다.》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의 쟁점은 무엇인가.
“지지율이 극히 낮은 기시다 총리로는 다음 총선에서 자민당이 싸우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으로 치러지는 선거다. 총재 선거 후보자들은 자민당 의원과 당원의 지지를 얻기 위해 다른 후보와의 차이를 드러내며 호소한다. 하지만 후보별로 크게 갈리는 쟁점은 딱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은 정책에 밝고 국제 분쟁, 군사력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다.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전 환경상은 어떤 외교 정책을 펼칠지, 무슨 계획을 가졌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남이 안심할 수 있는 표현을 잘 고르는 사람이 아닐까.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경제안보상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노선에 가장 충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만 이는 외교 정책이라기보다 국내에 어필하기 위한 매파, 내셔널리즘이라고 본다.”
―한국에선 일본의 차기 정권이 한일 관계 개선에 소홀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일본에서도 같은 의문이 있다. 그것이 한일 관계의 불행이다. 안정적인 신뢰 관계가 생겨도 상대가 금방 바뀐다. ‘한국 정권이 바뀌면 그동안의 협력 관계가 모두 사라져 버릴 수 있다’,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선언 같은 크고 중요한 변화가 얼마나 유지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나는 (이런 회의론에) 반론을 제기한다. 지금의 한일 관계 강화는 한일 지도자 개인의 신뢰 관계보다 미국 정부의 강한 요구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한미, 미일) 양자 동맹은 있지만 지역 동맹은 없는 현실에서 중국에 대항하는 게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큰 과제였다. 미국의 주도로 한일 관계가 호전됐다고 설명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한일 관계의 토대가 약할지 모르나 도전도 그다지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차기 총리도 지금처럼 한일 관계를 중시할까.
“고이즈미 전 환경상, 이시바 전 간사장이라면 틀림없이 그렇다. 현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고 본다. 안정적 상황은 외교 정책을 펼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다카이치 경제안보상도 이어가려고는 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다카이치 경제안보상이 생각하는 한일 관계와 현실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아베 전 총리가 한국과의 안정적 관계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호적 한일 관계가 계속되는 것을 환영하는 일본 국민이 많다는 점이다. 안보적 측면이나 북한과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일 협력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국민이 많다.”
“다카이치 경제안보상은 참배하겠다고 강하게 약속했다. 고이즈미 전 환경상은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했으니까, 참배를 해 왔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모순이 있다. 이유 없이 전쟁에 동원돼 죽은 병사를 애도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야스쿠니 경내 유슈칸(遊就館)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의미가 다르다.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병사를 추모하기 위한 별도의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 문제는 가능한 한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총리 때는 참배하지 않는다든지, 8월 15일에는 가지 않는다든지.”
―미 대선에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 겸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의 동아시아 확장 억제 약속이 지켜질지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재등장할 것이라는 공포는 한미일 정부가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고 본다.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동맹에 대한 약속이 약화할 것은 확실하다. 미국이 왜 한국, 일본을 지켜야 하는지 논란이 될 것이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지키고 있다기보다는 동맹 자체가 미국에 이익이 되는 것이지만, 트럼프는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다. 기시다 정권에서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한국에서 핵무장 논의가 활발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핵무장론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이 핵무장을 검토한다고 할 때는 뒤집힐 수 있다.”
―새로운 미 행정부, 차기 일본 정권에서 캠프 데이비드 선언 협력 체제가 100% 유지될 수 있을까.
“그건 할 수 있다. 캠프 데이비드 선언은 아직 느슨한 협력에 불과하다. 당시 한미일이 여러 합의를 했지만, 전부 미래를 향한 애매한 계획이었다. 3국 간 방위 협력이 진전됐지만 중국 혹은 대만 상황에 대한 것인지, 북한이 최대 관심인지에 대한 인식만 봐도 명확하지 않다.”
“과거부터 생각해 왔지만, G7 정상회의에 한국과 호주의 참여가 필요하다. 그 말을 꺼내고 호소하는 역할은 일본이 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은 세계의 중심적 국가이면서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경제에서도 대단한 공업국이다. 나는 1980년 한국의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세대다. 지금의 한국은 그때와 전혀 다른 나라다. 일본 역시 군부가 지배하고 아시아를 침략했던 수십 년 전 일본이 아니다. 이런 두 나라가 협력하지 못하는 건 이상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을 늘리거나 현상 변경을 하는 문제들과 달리 G7 참가국을 늘리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일 관계가) 이대로 멈춘다면 중국의 위협 앞에 지역 안보 협력으로 발전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한일 관계 개선을 심화시켰다는 것만으로 끝날 것이다. 한중일 3국 협력에서도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이 크다.”
―한일 관계에는 늘 과거사 문제가 어려움으로 따른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과거사는 사과, 보상도 문제지만 ‘아는 것’이 문제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언제 시작됐고 조선총독부에 누가 있었는지 등은 알고 있을지 몰라도, 식민지 지배의 현실이 어땠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노력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더욱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역사 문제를 정치에 이용한 건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이유 없는 불신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인은 역사 문제를 이유로 항상 일본을 비난한다는 편견이 생겼고, 일본이 희생자라는 분위기가 퍼졌다. 매우 잘못된 일이다. 역사는 계속 배우고 들어야 한다.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야 신뢰를 키울 수 있다. 포퓰리즘 정치 지도자가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기회를 차단할 수 있다.”
―차기 일본 총리의 최대 외교적 도전은 중-일 관계 아닐까.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는 침략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억지력 강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억지는 실패할 수 있다. 그게 가장 무섭다. 억지의 파탄을 피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협력을 계속해야 한다. 경제 외교가 대표적이다. 무역 의존도가 높고 안정적 무역의 제도화가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은 같은 입장이다. 군사적 대립은 앞으로 격화될 가능성이 있으니 비군사적 상황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다만 일본에서는 대(對)중국 억지, 대만 유사 상황에 대한 언급은 많으면서도 중국 공산당 독재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일본이 중국의 인권 침해, 억압을 비판하면 중국은 역사 문제로 맞받아친다. 이런 논의는 옳지 않다. 중국 국민도 자유로운 정부 아래서 살 권리가 있다. 이상주의라고 비판받을지 몰라도 리버럴리즘이 본래 그렇다.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한일이 손잡고 군정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당시 ‘식민지 지배를 한 일본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고 했지만, 오히려 식민 침략으로 유린했던 역사가 있기에 한국의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후지와라 기이치(藤原歸一)△1956년 일본 도쿄 출생
△도쿄대 법학부, 미국 예일대 대학원 졸업
△1999∼2022년 도쿄대 대학원 법학정치학연구과 교수
△2018∼2021년 도쿄대 미래비전연구센터장
△2005년 제26회 이시바시 단잔상 수상
△주요 저서 ‘전쟁을 기억한다’ ‘평화의 리얼리즘’ 등
△현 도쿄대 명예교수, 준텐도대 국제교양학부 특임교수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