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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매춘부 안내서가 18세기 영국 신사 필수품?

입력 | 2024-09-28 01:40:00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해리스 리스트’ 진실 추적기
취재 과정 추리소설처럼 흥미
◇코번트가든의 여자들/핼리 루벤홀드 지음·정지영 옮김/456쪽·2만2000원·북트리




1757년 영국 런던에서 ‘해리스 리스트’라고 불리는 작은 책자가 출간됐다. 출간 직후 책자는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신사들의 안주머니에 꽂혀 있던 필수품이 됐다. 25만 부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책자의 공식 제목은 ‘해리스의 코번트가든 여자 리스트’다. 매춘부들의 신상이나 특기가 꼼꼼히 정리된 일종의 성매매 안내서였다. 유흥가인 코번트가든으로 매춘을 하러 가기 전 남자들이 몰래 읽었던 비밀스러운 책자인 것이다. 책자엔 자극적인 이야기가 가득했다. 1795년 마지막 판본이 나온 뒤까지 40여 년간 모두가 그 이야기를 믿었다. 과연 책자에 담긴 이야기는 진짜였을까.

영국의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해리스 리스트’의 진실을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자를 쓴 건 아일랜드 출신 시인 새뮤얼 데릭이었다. 데릭은 허영심이 많았다. 매달 비싼 겉옷을 여러 벌 장만했다. 돈을 쓸 줄만 알고 벌기는 싫어했다. 빌린 돈을 갚지 않아 감옥에 가기도 했다.

데릭은 돈을 벌기 위해 매춘부에 관한 책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이들의 신상은 이미 남자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다. 결국 데릭은 당대 최고의 매춘부와 뒷골목에서 활약하는 포주를 만나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매춘가에 떠도는 여러 가지 소문을 진짜인 것처럼 그대로 받아 적었고 과장을 더해 마치 소설처럼 각색했다. 작가는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포주 이름을 따와 제목을 지었다. 출판업자들은 책자에 아름다운 여자 삽화를 넣어 환상을 자극했다.

저자는 해리스 리스트가 만들어진 과정을 좇으며 ‘매춘’을 바라보는 당대 사회의 시선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당시 매춘부는 대부분 미성년자였고 가난에 쫓기거나 성폭행을 당한 것을 계기로 매춘부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책에 이런 ‘고통’은 전혀 담겨 있지 않다고 평가한다.

책을 읽다 보면 수백 년 전 철저히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제작됐던 해리스 리스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저자가 현장 답사 등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과거를 파고 들어간 과정은 추리소설처럼 흥미롭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