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그러나 가다머는 근대과학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측정기술로 건강과 질병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플라톤에 따라 척도(메트로·측정)와 측정(메트리온·측정되는 것)을 구별하면서 근대과학과 마찬가지로 의학은 “현상을 측정하고 양화하는 총체적인 프로그램”만을 추진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검사는 환자의 상태를 기계로 측정한 결과를 정렬하고 수집하여 정리할 뿐이다. 의학은 ‘표준화’라는 조잡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가령 혈압이 일정한 수치를 넘어서면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내리게 된다. 수치를 기준으로 건강을 진단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지만 환자의 내면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건강을 양적인 표준값에 맞추다 보면 환자의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파악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 주관이다. 과학이 밖으로 드러나는 징후를 병으로 객관화하려고 해도 인간의 마음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다. 따라서 측정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다. 가다머는 치유의 과정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대화를 할 때 환자는 너무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점차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를 찾아야 한다.
이해는 정신분석학의 ‘대화적 치료’에서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의사는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해서 표준값을 마련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적 지식이나 경험 이상으로 중요한 환자와의 파트너십 형성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의사와 환자는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공통적 근거를 획득하기 위해 대화를 해야 하며 대답과 질문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치료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과학적 수치가 아니라 의사와 환자의 대화로 형성되는 둘 사이의 의미의 공통적 근거, 곧 언어적 지평이다. 다시 말해 환자의 능동적 참여(질문)와 의사의 세심한 배려(대답)의 해석학적 순환이 치유에서 결정적이다. 대화를 통해 진짜 질병의 원인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치료, 진단, 참여가 대화라는 언어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완성되기 때문에 인간은 삶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교환하게 된다. 고통을 겪는 환자의 마음 상태가 모두 열려 이해가 되어야 온전한 치료가 이루어지게 된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