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워드 개인전으로 본 작품세계
영국 런던의 미술관인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2018년 열린 이불 개인전 ‘Crashing’. 현지 관객들이 줄을 서서 관람하고 언론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이불의 새 전성기를 연 전시 중 하나. 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김민 문화부 기자
‘20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요제프 보이스가 사회를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제시한 역작 ‘7000그루 참나무’를 선보인 것은 61세입니다. 장미셸 바스키아처럼 20대에 뛰어난 감각을 발휘한 작가도 있지만, 그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더 큰 작업을 했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렇게 때로 나이가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작가가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며 피부로 겪은 바가 녹아드는 시간 덕분입니다. 현대미술 작품은 작가의 손기술뿐 아니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과정과 사상을 담기 때문이죠. 훌륭한 문학가가 젊은 시절 감각적인 작품을 하다가 연륜이 쌓일수록 인간을 깊이 고찰한 복잡한 작품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괴물, 현대인의 자화상
1989년 퍼포먼스 ‘욕망’을 담은 영상. 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실제로 보면 이 작품은 옳고 그름, 정치적 다툼 사이에서 배제된 당사자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이기보다는 여성 혹은 그 무언가로 낙인찍히기 전 개인이 몸으로 느끼는 바를 드러낸 과감한 고백에 가깝습니다. 이불은 2018년 당시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 디렉터와의 인터뷰에서 낙태에 관한 이야기를 왜 공개적으로 했느냐는 질문에 “삶 자체가 그렇고 삶에 관한 작업이기 때문”이라며 “인간이라는 존재는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수난 유감’ 같은 거리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길거리에서 촉수가 돋아난 옷을 입고 다니며 다양한 반응을 끌어낸 이 작품은 별난 여자의 희한한 행동인 걸까? 개인을 과도하게 옥죄는 경직된 윤리 의식 같은 제약을 보통 사람은 몸 안에 품고 괴롭게 살아간다면 이불은 이 작품에서 그것을 뒤집어 가시처럼 외부로 뻗어냅니다.
20대 때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했던 어느 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릴 수 있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갈망과 연결된 동시에 자유에 대한 느낌이었다”는 이불의 회고는 ‘나로서 온전히 살아 있음’을 느낀 통쾌함입니다.
깨지기 쉬운 현대 사회
그녀의 관심은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해 시스템과 문명의 취약함을 고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거대 서사(mon grand recit)’ 연작이 대표적입니다. 역사 속 사람들이 꿈꾼 유토피아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은 멀리서 보면 완벽하고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세계를 표현합니다.
이런 탐구를 구체적으로 전개한 작품은 ‘천지(Heaven and Earth)’입니다. 한국인이 신성하게 여긴 백두산 ‘천지’를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의 형태는 타일 욕조입니다. 욕조 가장자리를 산맥이 에워싸고 있어 욕조가 천지 호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검은 물이 가득합니다. 이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암시입니다. 박종철 사건은 독재를 억지로 이어가려던 정권을 무너지게 한 도화선이 된 사건으로, 개인의 탐욕과 오만함이 만든 허술한 시스템은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고층 빌딩과 복잡한 도로가 얽힌 도시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는 과학 기술과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도 돌아보게 합니다.
일련의 작업과 최근 메트 프로젝트까지 이불이 꾸준하게 보여주는 키워드는 바로 모순입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는 플라톤 중심적 사상의 뿌리는 세상 많은 일을 정해진 ‘개념’에 고정해서 이해하려 합니다. 이런 사고가 인류에게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준 것은 분명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한 것이 때로 놀랍도록 허약하고, 추하다고 여긴 것이 때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틀렸다고 믿은 것이 오늘은 정답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객관식 시험 답안지에 자신을 욱여넣고, 자라서도 ‘정답’이라고 믿는 것을 벗어나길 두려워하며 자신을 바늘로 찌르는 사람들에게 이불의 작품은 말합니다. 우리가 만든 감옥을 비집고 나가보자고. 인간이 사는 세상은 모순 덩어리라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