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져 있던 종묘와 창경궁-창덕궁 총독부 “도시 정비 위해 도로 필요”… 반대하던 순종 승하하자 공사 속도 “시민공원으로” 등 당시 여론 복잡 1932년 구름다리 설치하며 마무리… 결국 2022년 녹지로 연결해 복원
1914년 ‘종묘 관통’ 확정 못 했던 일제 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에는 경성 도로정비 사업 예정 노선이 표시돼 있다. 그런데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구간만은 표시돼 있지 않다.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 총독부가 이 공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할지 방침을 확정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염복규 교수 제공
《창경궁~종묘는 어떻게 끊겼나
1922년 늦여름 어느 날 창덕궁에 기거하는 순종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총독부 토목기사들이 종묘 경내에 들어와 도로 예정선을 측량하고 그를 표시하는 침목(枕木)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침목은 영녕전(永寧殿)과 불과 30∼40m 떨어져 있었다. 순종은 “크게 놀라시며” “차라리 창덕궁 땅을 더 범하도록 하고 영녕전에는 가깝지 아니하도록 주선하라시는 처분을” 내렸다. (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 순종은 1907년 즉위할 때부터 실제 권력 행사와는 거리가 먼 ‘허수아비 황제’였다.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발언을 찾기 어려운 순종이 총독부가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 사건이 거의 유일하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문제가 된 도로는 1912년 처음 결정된 경성 시구개정 사업의 제6호선이었다. 이 도로는 “광화문 앞에서 대안동 광장(안국동 4거리)을 경유하고, 돈화문통을 횡단하여, 총독부의원(서울대병원) 남부를 관통, 중앙시험소(대학로 한국방송통신대 역사관) 부근에 이르는” 구간이다(오늘날의 율곡로). 이 도로의 완성은 경성 시가지의 ‘바둑판형’ 정비의 관건이었다. 총독부로서는 절대 개통을 포기할 수 없는 도로였던 셈이다. 문제는 도로를 예정대로 부설하려면 조선시대부터 사실상 하나의 공간이었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관통’해야 하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직선으로 부설하려면 도로는 종묘 경내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 토목기사들이 부근에 침목을 설치하여 순종을 놀라게 한 영녕전은 정전(正殿)과 함께 종묘의 핵심적인 전각이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시설이다. 조선 건국기 종묘를 처음 조성하면서 건립한 정전에는 현재 국왕의 4대조와 함께 특별히 공덕이 있는 역대 국왕의 신주를 모셨다.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정전에 모실 수 없는 신주가 생기자 이를 모시기 위해 세종대 영녕전을 추가로 건립했다.
유교 사회에서 효는 최고의 이념이며, 효의 가장 중요한 실천 행위 중 하나는 선대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따라서 왕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종묘는 왕실이 효를 행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순종에게는 국왕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창덕궁의 ‘마지막 상궁’이었던 김명길은 “(순종은) 덕수궁으로 나들이를 하시는 외에 창덕궁 밖으로 행차를 하시는 것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선왕들의 능에 참배하실 때”뿐이었다고 회고했다(김명길 ‘낙선재주변’, 1977년). 예기치 않게 순종이 반발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1926년 순종 승하하자 도로 공사 재개 순종의 장의 행렬. 순종 생전에 관통 도로 공사를 주저하던 총독부는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다시 율곡로 공사를 재개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러나 실무 관리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공사의 책임자인 경성토목출장소장 혼마 도쿠오(本間德雄)는 훗날 “이 구간 공사에 대해 전주 이씨 종중의 반대가 심하자 총독은 몇 번씩 기다리라고 지시하는 등” 상당히 주저한 데 반해 자신은 이 공사를 “단연 해낼 작정으로” 곳곳에 “여러 가지 상담을 했”다고 회고했다(友邦協會 ‘朝鮮の國土開發事業’, 1967년). 도쿄제대 공대를 졸업하고 1915년 총독부에 부임하여 줄곧 ‘조선 개발’에 종사한 엘리트 토목관리 혼마는 총독, 정무총감 등의 여론을 살피는 태도, 정치적 고려 등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도로 공사는 다시 2년여가 지난 1928년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전주 이씨 종중의 반대는 여전했다. 일반의 찬반 여론도 설왕설래했다. 언론은 이 도로를 가리켜 ‘종묘관통선’이라고도 하고, ‘북부간선도로’라고도 했다. 느낌이 전혀 다른 명명이다. 도로 공사를 둘러싼 여론이 복잡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전에 들을 수 없었던 다른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이미 도로 공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진행된 1929년 6월 한 언론은 ‘종묘지대를 개방함이 여하(如何)―안식소 없이 헤매는 북부민을 보고’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 도로의 개통에 따라 궁궐과 종묘가 ‘분리’됨을 전제로 종묘의 개방과 공원화를 주장한다. “어디까지든지 종묘의 존엄만을 주장하여 시민의 신고(辛苦)를 그대로 시약불견(視若不見)한다는 것은 열성조(列聖朝)의 성덕에 위반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직지대가 사직공원이 되고 장충단이 장충단공원이 된 금일에 바늘 꽂기도 어려운 인구 조밀한 북부에 광활한 지역을 점한 종묘지대는 경성부민의 보건과 도시미를 위하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민중의 존숭심을 다시 환기키 위하야 공원으로 공개될 것은 금후의 조선 정세가 여하히 변할지라도 필연히 닥쳐올 운명이라고 아니 볼 수 없다.”(동아일보 1929년 6월 28일) 전통적인 관념에서 종묘의 위상을 논하고 그 훼손 문제를 논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 1931년에는 “불란서 거울방이 강화회의 장으로 되는 오늘에 조선의 종묘도 옛 모양과 옛 위의를 못 가지는 것이 그다지 민중의 서러울 바가 아닌 듯하다”는 언급도 등장한다(조선일보 1931년 8월 2일). 베르사유 궁전이 1차 세계대전의 강화회의장으로 쓰인 일을 빗대어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종묘 같은 장소의 쓰임도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이런 기사는 경성의 조선인 중심지에 예컨대 공원과 같은 절대 부족한 도시 시설을 요구하는 민간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2년 창경궁-종묘 사이에 도로-다리 1932년 율곡로 준공 직후 도로와 구름다리 전경.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2022년 녹지로 90년 만에 연결 복원 2022년 복원사업으로 기존 율곡로를 터널화하고 천장이 덮인 도로 위 빈터에 녹지를 조성해 북쪽 창경궁과 남쪽 종묘를 다시 연결한 모습. 서울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