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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곽도영]핵 억제력만 있나… 반도체 억제력도 있다

입력 | 2024-10-03 23:09:00

곽도영 산업1부 기자


인구 2300만 명의 작다면 작은 섬나라, 대만이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표지를 장식한 적이 있었다. 2021년 5월 1일 자, 제목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대만 수복을 노리는 중국의 위협이 커지던 시기였다. 팬데믹 이후 전 세계가 반도체 수급난에 부딪힌 때이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대만은 반도체 산업의 심장부”라며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칩 제조사인 TSMC는 최첨단 칩의 84%를 제조한다”고 썼다. 대만이 전쟁에 휩싸이면 이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전체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TSMC는 실제로 성숙 공정부터 당시 최선단인 5나노 공정까지 애플과 퀄컴, 인텔,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 미국 주요 정보기술(IT) 기업 대부분의 반도체를 만들어 납품하고 있었다. 사실상 ‘미국의 반도체 공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은 중국의 연이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만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양국의 연합훈련을 공개했고,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거물들이 잇달아 대만을 찾았다.

지난주 참석했던 대한상공회의소-한미협회 ‘한미 산업협력 콘퍼런스’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주제발표에 나선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미 대선에 따른 산업계 영향을 분석하다 “2030년이 되면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 내 미국의 반도체 의존도가 일정 수준으로 낮아지기 때문에, 대만 이슈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관여할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조 바이든 정부 들어 미국에 착공한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팹들이 대부분 2030년이면 안정적인 생산에 들어갈 것임을 가정한 것이다. 미국은 반도체 수급난 이후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최근 인텔의 위기와 삼성, TSMC의 팹 건설 지연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궁극적인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권 교수의 지적은 대만을 겨냥했지만, 미중 전선의 또 다른 최전방인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는 같다. 한국은 미국의 오랜 군사 동맹을 넘어 이제 첨단전략 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안보 동맹이 됐다. 하지만 앞으로 미국 내에서 ‘아메리카 퍼스트’ 여론이 높아지고, 세계 경찰로서의 리더십보다 자국의 안위가 우선된다면 한국엔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불안 요소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반도체 공장으로서 대만이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듯 한국의 반도체도 단순한 산업 그 이상을 의미한다. 대만이 우리와 다른 게 있다면, 대만 정부와 국회 여야, 국민 여론은 여러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단결해 왔다는 점이다. 2029년까지 연구개발(R&D)비 세액공제 25%를 보장하는 대만판 칩스법은 여야 이견 없이 초고속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TSMC가 공장을 짓는 지역에는 정부가 나서서 발전소와 재생수 공장을 신설했다.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상대의 도발을 억제하는 핵 억제력과 마찬가지로, 산업 연관성이 밀접해지는 시대로 갈수록 첨단 산업의 억제력은 커질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에 한국 반도체가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될 때 우리는 강대국 간 긴장 사이에서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다. 


곽도영 산업1부 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