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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집단광기 빠진 마을, 그들은 ‘이식된 꿈’을 앓고 있다

입력 | 2024-10-05 01:40:00

중국의 한 마을 점령한 몽유병… 악몽 속에서 온갖 범죄 저질러
집단주의-감시 등 현실 비유… “마술적 리얼리즘 수작” 평가
◇해가 죽던 날/옌롄커 지음·김태성 옮김/520쪽·2만2000원·글항아리



저자 옌롄커는 언론 인터뷰에서 줄곧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밝혀 왔다. 소설 ‘해가 죽던 날’에서도 작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작중 인물 ‘옌롄커’를 실패한 무명 작가로 묘사한다. 다만 현실에서도, 작품 안에서도 옌롄커는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고 쓴다. 글항아리 제공


6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어슴푸레 저녁이 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꿈이 중국의 한 시골 마을을 집어삼킨다. 꿈은 이 마을에 전염병처럼 퍼지더니 주민들이 하나둘씩 깊은 몽유(夢遊)에 빠져버린다. “들새들이 사람의 뇌 속으로 들어간” 듯 이성을 잃기 시작한 주민들은 점차 본능에 충실해진다. 밤이 깊어지자 누군가는 자살하고 다른 이들은 도둑질, 강간,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악몽으로 허우적대는 주민들을 지켜보는 건 14세 소년 ‘녠녠’과 아버지 ‘리톈바오’. 장례용품점을 운영하는 부자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때아닌 호황을 맞는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을 가둬 놓은 이 꿈이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몽이 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 부자는 중대 기로에 선다. 악몽을 방관할 것인가, 사람들을 꿈에서 깨워 마을을 구할 것인가.

노벨 문학상에 근접한 중국 작가로 평가받는 옌롄커(66)의 ‘해가 죽던 날’이 국내 출간됐다. 원제는 ‘일식(日熄)’. 2015년 대만에서 처음 출간된 뒤 중국어로 쓰인 작품에 수여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홍루몽상을 받았다.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정작 중국에선 이 책을 볼 수 없다. 전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물처럼 당당하게’ ‘딩씨 마을의 꿈’ 등과 마찬가지로 국가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가 금서(禁書)로 지정했기 때문. 신간 역시 상징과 은유를 총동원해 중국의 비참한 현실을 겨냥했다.

작품을 관통하는 소재는 ‘꿈’이다. 짙은 안개처럼 꿈이 한 마을을 감싸고, 사람들이 집단 최면에 빠지듯 꿈에 취해 있다. 하룻밤 사이 꿈과 현실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구운몽 같은 설화를 읽는 듯한 느낌도 준다. 마을이 어둠으로 뒤덮이고, 아침이 됐는데 해가 계속 뜨지 않는 설정 등은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환상적 분위기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하는 데 쓰인다. 이 작품에 대해 “마술적 리얼리즘의 수작”이라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주된 화자인 소년 녠녠은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얘기를 좀 들어달라”며 독자들에게 거듭 읍소하는데 중국 어딘가에서 실제 벌어지는 비극을 전하듯 생생하게 읽힌다. 예컨대 이권 다툼에 골몰하고, 가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옆 사람을 밀고해 이득을 챙기는 이야기가 나온다.

알 수 없는 꿈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설정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꿈이 ‘집단 비이성’과 ‘광기’에 대한 은유임이 드러난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국공산당이 강조한 ‘중국몽’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마을에 덮친 몽유를 끝내기 위해 동네 산에 큰불을 낸다. 사람들은 큰불을 보며 아침이 찾아온 줄 알고 몽유에서 깨기 시작한다. 이 마을은 진정 꿈에서 깨어난 것일까. 작가는 본인과 같은 이름의 작중 인물 ‘옌롄커(閻連科)’를 소설에 등장시켜 이렇게 되묻는다. “자네 몽유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깨어 있는 건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