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핵시설로 본 북한 핵능력은 고농축우라늄 시설 이례적 공개… 원심분리기 자체 개발해 성능 개선 美 대선 전후 7차 핵실험 위험 커져… 2021년 가동 재개한 영변 핵시설 언제든 플루토늄 생산 가능한 상태… 한국 정부 “70kg 보유” 공식 평가 2030년엔 핵무기 300기 생산 유력… 서위리 등 비밀 핵시설 가능성도
북한 관영매체인 노동신문은 지난달 1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무기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기지를 현지 지도하며 핵탄 생산 및 현행 핵물질 생산 실태를 료해(점검)하고 무기급 핵물질 생산을 늘리기 위한 전망계획에 대한 중요 과업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뉴스1
“하나는 도움이 안 되고, 둘도 셋도 넷도 도움이 안 된다. 다섯은 도움이 된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주요 대북 제재 해제를 대가로 평안북도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겠다고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은 북한의 핵시설 5곳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했다. 2020년 9월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이 출간한 ‘격노(Rage)’에 담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의 속사정이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후 “고농축우라늄(HEU) 시설의 해체가 필요했지만 북한은 우라늄까지 (제시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면서 자신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이유도 설명했다.
그로부터 5년 7개월이 지난 올해 9월, 북한은 HEU 제조 시설을 전격 공개했다.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가 빽빽이 들어선 모습을 보며 김 위원장은 “정말 이곳은 보기만 해도 힘이 난다”며 흡족해했다. 북한 매체는 이 시설의 위치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 정부는 하노이 회담 당시 미국이 영변 외 ‘플러스알파’ 핵시설 중 하나로 지목한 평안남도 강선 핵시설로 판단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최후의 카드’로 거론되는 7차 핵실험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주요 핵시설을 중심으로 북한이 어떻게 핵능력을 고도화했는지 조명해본다.
● 베일 벗은 강선, 우라늄 농축 능력 향상
평양에서 남서쪽으로 수십 km 떨어진 강선의 우라늄 농축 시설은 북한이 지난달 시설을 전격 공개하면서 최근 더욱 주목받고 있지만 사실 미 정보당국은 2000년대부터 북한이 은밀하게 가동해온 핵시설로 주시해왔다. 미국 언론은 2018년 강선 시설의 우라늄 농축 규모가 영변의 두 배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번에 북한이 관영매체에 공개한 수천 개의 원심분리기는 168∼170cm로 알려진 김 위원장 키와 비슷했다. 과거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북한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P-1, 2형(높이 약 2m) 원심분리기보다 다소 작은 것. 2010년 영변 핵시설 내 우라늄 농축 시설을 참관했던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북한이 P-2형 원심분리기 2000대로 연간 40kg의 HEU를 만들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긴 원통 모양의 원심분리기는 분당 수만 회의 고속 회전으로 발생하는 원심력을 활용해 HEU를 만든다.
군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강선과 영변의 우라늄 농축 시설에서만 원심분리기를 1만∼1만2000개가량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2000개의 원심분리기에서 연간 약 40kg의 HEU를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산술적으로 매년 200∼240kg의 HEU를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핵탄두 1개를 만드는 데 HEU가 25kg가량 필요한 만큼 북한이 HEU로만 매년 8∼10개의 핵탄두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한미 당국은 북한이 강선과 영변 시설의 우라늄 농축 시설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동향을 포착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영변 시설의 경우 헤커 박사가 밝힌 규모(원심분리기 2000개)보다 두 배 이상으로 확장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8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올해 2월 시작된 강선 시설 별관 공사가 4월 마무리돼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났고 5월엔 인접한 건물에 대한 개축 공사도 진행됐다며 강선 시설이 가동되는 징후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김 위원장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른 ‘새 형의 원심분리기’ 도입도 계획대로 내밀어 무기급 핵물질 생산 토대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향후 현 기종보다 우수한 신형 원심분리기를 도입·가동해 전방위적으로 HEU를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밝혔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은 “북한이 공개한 시설 사진에 캐스케이드(원심분리기를 다단계로 연결한 설비)가 설치돼 있지 않은 원심분리기들이 보이는데, 신형으로 판단된다”면서 “영변에 있는 원심분리기가 NK(North Korea)-1 모델이라면 강선 시설에 설치된 건 NK-2, 신형은 NK-3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 ‘핵 심장부’ 영변, 언제든 플루토늄 추출 가능
이와 함께 북한은 또 다른 핵물질인 플루토늄 증산도 병행하고 있다. 한미 당국은 그동안 북한의 유일한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 거점으로 북한 ‘핵 심장부’인 영변 핵시설의 5MW(메가와트)급 원자로가 가동되는 동향을 추적해왔다. 플루토늄은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연소시켜 폐연료봉을 만든 뒤 이를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재처리하는 과정을 거쳐 추출된다.
특히 한미 당국은 2021년 재가동 이후 3년이 지난 현시점에 북한의 이 5MW급 원자로에서 언제든 폐연료봉을 인출·재처리가 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있다. 즉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북한은 이 플루토늄을 약 70kg 보유한 것으로 우리 정부는 공식 평가하고 있다. 핵무기 1개 제작에 4∼6kg의 플루토늄이 필요한데 산술적으로 12∼18개의 핵탄두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정보당국도 북한의 플루토늄, HEU 보유량을 고려할 때 북한이 두 자릿수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하고 있다. 아산정책연구원과 미 랜드연구소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북한이 연간 18기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다면서 그 추세에 따라 2030년쯤이면 핵무기 300기 생산 문턱에 도달할 것으로 봤다.
● ‘제3의 비밀 핵시설’ 가동 가능성도
여러 전문가는 북한이 영변이나 강선 외에도 제3의 비밀 핵시설을 은밀하게 가동해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2019년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폐기를 요구한 5곳의 핵시설을 두고 국내외에선 영변과 강선을 제외하고 이 리스트에 포함된 나머지 비밀 핵시설이 평안북도 태천, 자강도 희천, 양강도 영저리 등이란 관측도 나온 바 있다.
미 국방정보국 출신 브루스 벡톨 앤절로주립대 교수는 2019년 미국의소리(VOA)에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 인근 서위리의 핵시설을 언급한 것 같다”면서 “미 정보당국은 이미 2010년 서위리 시설에서 영변보다 많은 양의 HEU를 생산하고 있다고 파악했다”고 했다. 이 서위리 시설에 대해 올리 헤이노넨 전 IAEA 사무차장도 “1993년 영변 사찰 당시 10km 떨어진 이곳의 사찰을 요청했지만 북한이 허용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밖에 황해북도 평산과 평안북도 박천, 자강도 하갑 일대에는 우라늄 광산과 정련 시설 등이 갖춰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은밀하게 제3의 핵물질 생산 시설이 운용되고 여기에 김 위원장이 공언한 신형 원심분리기 증강 배치가 현실화되면 북한의 ‘핵무기고’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조한범 위원은 “원심분리기 공법도 전력이 많이 들어 (한미 자산에) 탐지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다른 곳에 핵시설이 있다 하더라도 주요 시설은 영변과 강선일 것”이라고 전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