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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숲인가, 숲이 나인가… 원시림에 꿈처럼 녹아드네[여행스케치]

입력 | 2024-10-05 01:40:00

강원 원주시 편



강원 원주시 신림면 성황림 당집 앞에서 올 7월 말 ‘음악의 뮤즈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열린 ‘원주 사색 크리에이투어’ 작은 음악회. 원주시농촌체험휴양마을협의회 제공


‘동반치악(東蟠雉岳) 서주섬강(西走蟾江).’ 동쪽으로 치악산(雉岳山)이 둘러 있고 서쪽으로 섬강이 내달린다. 조선 초기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강원 원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치악산은 원래 적악산(赤岳山)이었다. 가을 단풍에 빨개진 산이 절경일 터다. 치악산의 치(雉)는 꿩이다. 뱀에게서 자신을 구해준 선비의 목숨을 살리려고 꿩이 치악산 상원사 범종(梵鐘)을 머리로 받아 세 번 울리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치악산이 됐다는 설화다. 해발 1100m 상원사로 가려면 원주시 신림면 성남리 성남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계곡을 오르면 된다. 그런데 또 다른 길이 있다.

● 원시림에서 나를 생각하다

판부면 용수골에서 매년 5∼6월 열리는 꽃양귀비축제.

호저면 자작나무숲 둘레길 요가 체험.

성남리 성황림(城隍林)이다. 마을과 땅을 지켜준다는 서낭신을 모시는 당집이 있는 숲이다. 이 숲길을 따라가도 상원사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숲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93호 보호림이어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다.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숲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며 사는 민가가 70채 남짓 있었다. 하지만 성황림을 관통하는 마을 진입로가 1984년 폐쇄됐고 1989년부터 일반인 출입을 통제했다.

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나와 있는 성황림은 가을이나 겨울에 잎을 떨구고 봄에 새잎이 나는, 납작하고 넓은 잎의 낙엽활엽수 90여 종으로 이뤄져 있다. 넓이는 약 30만 ㎡(약 9만 평). 대충 둘러봐도 소나무 전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칭칭(층층)나무 피나무 물푸레나무 고로쇠나무 벚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상수리나무 팥배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포플러 아카시아 귀룽나무 쪽동백 들메나무 졸참나무 등이 사람 손길 타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군집을 이룬다.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만은 아니다. 매년 당제(堂祭)를 치르는 4월 초파일과 9월 9일에는 곁을 내준다. 당집은 장대한 당목(堂木) 두 그루를 거느리고 있다. 왼쪽에는 음나무, 오른쪽에는 젓나무다. 높이는 20m가 넘고 성인 두어 명이 감싸안아야 할 만큼 아름드리나무다. 젓나무 앞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는데 서낭신을 지켜주는 수비 역할이다.

옛날에는 그해 가족이 세상을 떠나거나 병에 시달리지 않는 등 ‘부정(不淨)하지 않은’ 가구를 도가(都家)로 삼아 그 집에서 금(禁)줄을 치고 제물을 장만했다. 당집에 묻어둔 단지에 옥수수로 술을 빚어 제주(祭酒)로 썼다. 마을 연장자가 바가지에 담은 숯 띄운 맑은 물을 당집 안 곳곳에 뿌리며 축원(祝願)한다.

문막읍 동화마을수목원.

원시림에 가까운 숲속에서 제 마음대로 뻗은 줄기와 가지들 아래로 발걸음을 옮긴다. 30년 넘게 인적도 드물어 길인 듯 풀밭인 듯 희미한 자취를 따라 걷는다. 내가 숲에 녹아든다.

● 기하학적 공간에서 나를 찾다


‘여행이란 단지 신체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립한 자아의 발견 과정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여행관(觀)이다. 그는 저서 ‘연전연패’(2004년)에서 ‘현실에 얽매여 살아가다 보면 좀처럼 얻을 수 없는 내성(內省)의 시간을 준다’고도 했다. 그가 스스로를 성찰해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을 원주에도 마련해뒀다. 지정면에 있는 미술관 ‘뮤지엄 산(Museum SAN)’이다. 해발 275m 산 정상에 있어 이름도 산이다.

지정면 뮤지엄산의 알렉산더 리버먼 작 ‘아치웨이’. 원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뮤지엄 산은 그의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응답한 끝에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 자체의 이데아가 있을까 싶지만, ‘철 유리 콘크리트라는 소재의 사용과 구성에서 기하학을 준수하는 특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선 면 도형의 기하학은 뮤지엄 산 명상관에서 극적으로 대면할 수 있다. 노출 콘크리트 건물 삼각형 입구로 들어간다. 정사각형 공간이 나온다. 천장 중앙을 가로세로로 오가는 긴 틈이 있다. 십자가다. 비가 오면 비가, 해가 뜨면 빛이 들어온다. 사람은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대지 7만1172m²(약 2만1530평), 건평 5445m²(약 1648평) 규모지만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간으로 들어가면 다른 공간으로 나아가는 선과 면과 도형이 있다. 발견의 연속이다. 그렇게 안팎을 돌고 나면 카페 테라스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전경(全景)은 그냥 산 정상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공간(space)과 예술(art), 그리고 자연(nature)의 융합이다. 그래서 산(SAN)이다.

● 섬강 변에서 나를 잊는다

서쪽으로 달려 경기 여주 여강이 되고 남한강으로 합쳐지는 섬강으로 간다. 실학자 이중환은 1751년 펴낸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원주가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들판이 섞여 열려서 명량(明亮·환하게 밝다)하고 수려하며 몹시 험하거나 막히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2018년 제1야전군사령부가 해체되면서 원주는 군사도시라는 오랜 칭호를 벗었다. 그렇다고 농촌이라니…. 이상하다 싶다가도 이중환의 말대로 산골인 듯한데 들어가면 널찍한 논밭이 펼쳐진다. 호저면 섬강 변이 그렇다.

강변 매화향 짙은 매향골에는 섬강 자작나무숲 둘레길이 있다. 덱(deck·갑판) 형태 길을 따라 언덕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자작나무숲이 나온다. 언덕과 강변을 잇는 산책로는 총연장 4km다. 덱 길 중간쯤에 쉼터 같은 공간이 있는데 여남은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아침에 매트를 깔고 명상에 잠긴다. 번잡한 곳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 어려웠다면, 이곳은 나를 내려놓고 잊기에 적합하다.

바로 길 건너가 칠봉체육공원이다. 잔디 축구장 3개 면이 이어져 있다. 보더콜리나 시베리안허스키같이 왕성한 운동력을 자랑하는 반려견 목줄을 풀어 뛰어놀게 하면 참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마을에서는 관리 문제로 꺼리는 눈치라 아쉽다.

동학운동이 탄압을 받던 때 동학 교도들이 피신처로 많이 찾은 곳이 원주다.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도 이곳으로 도망왔다. 당시 동학도들이 밖으로 안부를 전할 때 ‘모월산(母月山)에 기거하고 있다’는 말을 암호처럼 썼다고 한다. 원주가 엄마처럼 편하고 따뜻하게 돌봐주고 있다는 뜻이었을 게다. 모월을 브랜드 이름으로, 원주에서 나는 토토미(土土米·삼광 품종)로 술을 빚는 협동조합 모월양조장이 판부면에 있다. 2020년 우리술 품평회 대통령상에 빛난다.

나를 생각하고, 찾고, 잊어버리게 하는 원주를 한꺼번에 즐길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농촌 크리에이투어다. 크리에이티브(Creative·창조적인)와 투어(Tour·관광)의 합성어로 2017년 시작된 농촌관광 활성화 사업의 새 형태다.

섬강매향골 스카프 천연 염색 체험.

원주시 농촌체험휴양마을협의회는 사색(思索)이라는 주제 아래 성황림, 뮤지엄 산, 섬강매향골 자작나무 둘레길, 모월양조장, 삼송마을, 소금산 출렁다리, 승안동마을, 치악산 황장목숲길을 비롯해 7개 마을 곳곳을 이리저리 묶어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 여정의 프로그램으로 제안하고 있다. 성황림 당제 날짜는 지났지만, 프로그램에 신청하면 숲속 당집 앞에서 열리는 작은 연주회에도 참여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농촌 크리에이투어는 원주 말고도 전국 19개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웰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원주=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