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화 사고 멈추는 법 사소한 일에도 극단적 결과 상상 실제보다 문제 과장하는 인지 오류… 정도 심하면 우울감-스트레스 커져 부정적 생각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최악 상황 일어날 가능성 따져봐야
중소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A 씨는 사장단 앞에서 업무 계획을 발표하다가 내용에 대한 몇 가지 지적을 받았다. A 씨는 지적받은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발표를 마쳤지만 ‘무능하다고 찍힌 게 틀림없다’는 불안감이 덮쳐왔다. 그는 “앞으로 승진은 글렀고, 연봉은 한 푼도 오르지 않을 것이며, 곧 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이직이 답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6세 딸을 키우는 40대 주부 B 씨는 딸이 유치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친구들이 딸에게 조금이라도 불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을 본 날엔 걱정으로 잠을 설친다. 혹시 왕따는 아닌지, 초·중·고등학교에서도 친구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그로 인해 평생 큰 상처를 받진 않을지 걱정돼서다. 아예 유치원이나 학교를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위기 상황에 걱정을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위 두 사례처럼 중간 과정 없이 극단적인 결론으로 치닫는 경우엔 얘기가 좀 다르다. 이들은 특정 생각에 꽂히면, 마치 고속도로에서 액셀을 밟듯 최악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러다 보면 실제 일어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착각하기 쉽다. 사소한 일에도 ‘망했다’ ‘끝장이다’라며 스스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사람들은 왜 그런 걸까. 이런 생각을 완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가능한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는 것을 파국화(破局化·catastrophizing) 또는 재앙화 사고라고 한다. 사소한 일이 비합리적으로 과장돼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 게 특징이다. ‘중간고사를 망치면 대학에 못 가고, 취업도 못 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또는 ‘회사에서 실수하면 잘리고, 노후 준비도 못 한 채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식이다. 매우 빠르고 자동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부정적 사고는 불안, 우울,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래서 파국화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미국의 심리학자인 앨버트 엘리스는 “사람들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과 관련한 극단적인 신념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했다. ‘인간은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점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고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래서 엘리스는 잘못된 신념을 수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심리학자인 에런 벡은 우울증 환자를 연구하면서 이들에게 파국화와 같은 공통된 사고 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사고 과정을 통틀어 인지 오류(cognitive errors)라고 불렀다. 생각에 논리적 비약이 있다는 의미다. 파국화를 비롯해 한두 사례만으로 일반적 사실로 믿어버리는 과(過)일반화, 세상을 흑백논리로 바라보는 이분법적 사고 등도 인지 오류다.
인지 오류는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7년 펴낸 ‘한국 국민의 건강행태와 정신적 습관의 현황과 정책대응’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1만 명 중 90.9%가 인지 오류에 해당하는 사고 습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건강을 해치는 습관적 사고가 그만큼 알게 모르게 널리 퍼져 있다는 의미다.
평소 불안을 잘 느끼는 사람일수록 파국화 사고가 잘 나타난다. 마이클 베이시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진은 평소 자주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파국화 양상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봤다.
우선 사전 검사를 통해 자주 불안을 느끼는 24명(일명 ‘걱정 그룹’)을 선발했다. 이들은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평균 60%를 걱정하는 데 쏟는 사람들이었다. 또 별다른 걱정 없이 사는 24명(일명 ‘평온 그룹’)을 추가로 뽑았다. 이들의 하루 평균 걱정 시간은 5% 미만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삶에서 가장 걱정되는 주제를 뽑아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우려되는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안 좋은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그 결과 걱정 그룹은 평온 그룹보다 2배 많은 걱정을 쏟아냈다. 결말도 훨씬 비극적이었다. 예를 들어 ‘만약 시험을 망친다면?’이라는 주제에 대해 걱정 그룹은 ‘스스로에게 실망할 것이다’부터 시작해 ‘내 삶 전반에 자신감을 잃을 것이다’ ‘불안감이 커지고 극도로 예민해질 것이다’ ‘정신적으로 미쳐버릴 것이다’ ‘약물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죽고 싶을 것이다’ ‘지옥에 갈 것이다’까지 극단적으로 뻗어 나갔다. 이들은 최악의 상황이 실제 일어날 거라고 믿는 수준도 상당히 높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동안 불안감이 급격히 커졌다.
반면 평온 그룹은 ‘평균 성적이 낮아질 것이다’ ‘좋은 직장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급여가 적을 것이다’ ‘원하는 데 돈을 쓸 수 없어 불행할 것이다’ 같은 비교적 현실적인 걱정을 했다. 결정적으로 최악을 상상하는 동안 별로 불안해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평소 걱정이 많은 사람은 기억 속에 저장된 최악의 시나리오 정보가 많기에 안 좋은 생각을 더 잘 떠올릴 수 있다”며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현실 가능성을 크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위협적인 정보에 남들보다 ‘촉’이 예민하다. 불안을 일으키는 부정적인 단서는 확대해서 지각하고, 긍정적인 단서는 무시하는 인지 편향(cognitive bias)이 일어나서다. 그래서 작은 단서에도 불안감이 쉽게 불붙고, 불행한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 쉽다.
실제로 뇌신경 활동을 관찰하면 이런 현상이 그대로 관찰된다. 미 플로리다대 연구팀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 어려워하고, 대인관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회불안장애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타인의 표정을 관찰할 때 뇌의 변화를 살펴봤다. 사회불안장애 수준이 높은 그룹과 낮은 그룹 17명을 각각 선발해 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웃는 표정, 무표정(중립), 화난 표정을 보여주고 뇌파검사(EEG) 등을 통해 관찰했다.
그 결과 사회불안이 높은 이들은 유독 화난 얼굴에만 더 강한 신경 반응을 보였다. 다른 표정보다 화난 얼굴에 주의를 더 쏟았다는 의미다. 이들에게 화난 얼굴은 대인관계 문제로 이어지는 불안 신호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난 얼굴로 인해 나타난 뇌신경 활동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됐는데, 한번 불안감이 발생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불안 수준이 낮은 이들이 화난 표정보다 웃는 표정에 더 많은 주의를 쏟은 것과 대비된다.
● 파국화 사고, 어떻게 완화할까
탈(脫)파국화의 첫걸음은 나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가는 부정적 생각을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박기환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장)는 “불안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불안한지, 이때 신체감각은 어떤지, 무슨 생각이 드는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그 생각이 적절한지를 살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특히 최악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을 짚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어 혼자서도 해볼 수 있다. 최악의 결과를 지지하는 객관적 근거와 그에 반하는 근거를 각각 나열해 보고, 더 확실한 쪽을 택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앞서 사장단 앞에서 발표 후 이직을 고려하는 A 씨의 사례로 살펴보자. ‘회사에서 무능하다고 찍혔다’는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로 ‘발표 내용을 지적받았다’ ‘사람들이 왠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것 같았다’ ‘발표가 끝난 뒤 아무도 잘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반박할 근거로 ‘지적받은 내용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마무리 지었다’ ‘발표를 못했다고 직접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발표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듣는 사람도 있었다’ 등이 있을 수 있다. 이때 다른 사람의 한심하다는 표정과 같은 주관적인 느낌은 실제 사실과 다를 수도 있으므로, 판단 근거에서 제외한다.
이렇게 하나씩 따져보면 회사에서 찍혔다고 확신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반대 근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직해야 한다는 최악의 결과는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부정적 생각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떠오르기에 반복적 훈련이 요구된다. 박 교수는 “잘 풀리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가장 현실 가능한 결과는 무엇인지 스스로 답하면서 현실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