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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의 무비홀릭]흑백 요리사와 공정 판타지

입력 | 2024-10-07 23:09:00

영화 ‘믹의 지름길’ 포스터. 인디언은 선인가, 악인가.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 영화 ‘믹의 지름길’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제목만 봐도 내용이나 결말을 딱 알 수 있는 영화가 있어요. 허진호 감독의 ‘외출’(2005년)이 그래요. 각자 배우자를 둔 배용준과 손예진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는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외출’이겠어요? 잠깐 나갔지만 결국엔 집으로 돌아온다, 둘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한단 복선이죠. 둘이 맺어질 결말이라면 제목은 ‘가출’이나 ‘출가’나 ‘탈출’이었겠죠?

최근 개봉한 ‘조커: 폴리 아 되’도 마찬가지죠. ‘조커’(2019년)의 속편인 이 영화의 부제 ‘폴리 아 되(Folie `a Deux)’는 두 사람이 같은 망상을 공유하는 정신적 장애를 일컫는 의학 용어예요. 광남(狂男) 조커가 광녀(狂女) 할리 퀸을 만나면서 서로의 영혼 속에 잠들었던 광기를 일깨운다는 이 미국 영화가 굳이 발음도 어려운 프랑스어를 부제로 갖다 쓴 것만 봐도 내용이 ‘의미 과잉’임을 벌써 눈치 챌 수 있죠. 전편이 베니스영화제 최고상(황금사자상)을 받은 게 독이 되었을까요? 속편은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는 바람에 쪼그맣고 여물지 않은 알맹이를 필요 이상의 심각성으로 눙쳐버린 작품이 되고 말았어요.

[2] 제목으론 짐작조차 하기 힘든 영화도 있어요. ‘믹의 지름길(Meek’s Cutoff)’이란 서부영화가 그런 경우죠. ‘퍼스트 카우’(2021년)라는 사색적 웨스턴을 통해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가 백인 영웅들의 무용담이 아니라, 요리사 이민자 같은 무명씨들의 노동과 그들이 벌인 먼지 같은 생존 투쟁의 퇴적물임을 주장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2010년 작이지요. 이 영화, 내용이 끝내줘요.

1845년 미국. 백인 이주민 일곱이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서부 정착지로 이동 중이에요. 길잡이는 믹. 인디언을 피해 가는 경로를 유일하게 아는 것으로 알려진 거친 백인 남자지요. 하지만 믹은 소문만큼 유능하지 못했고, 이내 길을 잃고 사막 한가운데 고립돼요.

때마침 일행은 인디언 남자와 마주쳐요. 인디언을 붙잡은 믹은 “이놈이 동료들을 불러 우리의 가죽을 벗길 것이다.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살림을 도맡아 온 억척스러운 에밀리 부인(미셸 윌리엄스)은 “인디언에게도 선(善)의지는 있을 것”이라면서 “호의를 베풀면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맞서요.

급기야 식수가 바닥나고 죽음의 문턱. 순간, 인디언이 저 멀리 언덕 너머를 가리키며 “카타다사야 와투카대후여”라고 중얼거려요. “언덕만 넘으면 물이 있다는 뜻”이라는 에밀리 부인과 “언덕 뒤에는 인디언들이 기다릴 것”이라는 믹. 극한의 갈등 속에 일행은 결국 언덕을 넘기로 합니다. 자, 언덕을 막 넘은 일행에겐 어떤 장면이 펼쳐지면서 영화가 끝날까요? ①인디언들이 화살을 겨눈다 ②맑은 물이 넘치는 호수가 있다 ③허망하게도 또 다른 사막이 이어진다. 정답은? 바로바로….

없어요. “인디언을 끝까지 믿어보자”는 에밀리 부인을 따라 일행이 언덕을 오르려는 찰나, 영화는 덜컥 무심하게 끝나버려요. 보고 나면 사흘은 출근도 하기 싫을 만큼 열린(아니 미친) 결말이지요? 서부 개척의 역사는 빵 굽고 빨래하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황무지를 걷고 또 걸었던 여성들의 것이었다는 시선이 탁월해요. 동시에 선과 악을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살육을 정당화하며, 두려움을 용기로 포장하려는 남성 세계의 야만성이 열린사회의 적임을 깨닫게 하죠.

[3] 아, 그럼에도 선과 악을 나눌 공정한 잣대란 정녕 없을까요?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법에도 기대어 보지만, 현실에선 법도 엑스트라로 밀려난 지 오랜 것 같아요. 현직 판사(실제론 판사의 몸에 들어간 악마)가 법의 한계를 스스로 절감하면서 악당의 배에 지옥의 칼을 꽂는다는 지상파 드라마(‘지옥에서 온 판사’)에 대중이 뜨겁게 반응하는 현상은 법, 정의, 공정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추락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위험 징후일 수도 있죠.

[4]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란 넷플릭스 콘텐츠가 신드롬인 이유도 다르지 않아요. 클라이맥스는 단연 ‘블라인드 테스트’예요. 심사위원인 백종원 외식사업가와 안성재 셰프가 눈을 가리고 입을 아 벌린 채 오로지 미각만으로 심사하는, 영화보다 영화적인 순간이죠. 전국구 유명 셰프든 동네 중국집 주인장이든 오로지 실력으로만 승패를 가리는 이 초현실적인 장면에 저는 열광하고 말았어요. 그러곤 분노했어요. 공정이 씨가 마른 현실이다 보니, 어느새 공정이 예능 프로에서나 감격 속에 만날 법한 판타지가 되어버린 우습고 슬픈 현실이라니요! 이러다간, 마지막 남은 ‘공정남’ 송새벽이 고독감에 사무치다 떠난 땅끝마을 여행에서 세상 마지막 ‘공정녀’ 김고은과 운명적으로 마주친다는 ‘공정러: 폴리 아 되’ 같은 판타지로맨스물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어요.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