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균형발전-청년 일자리 등 명분 객관적 효과분석 없이 76건 집행 감사원 “타당성 부족-과다 책정 다수 일부는 채 하루도 안돼 심의 통과”
2020년 3월 정부는 공공하수 처리장에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해 운영비를 절감하겠다며 ‘하수처리장 지능화 사업’을 벌였다. 전북 김제시와 충남 공주시에서의 시범사업 결과도 나오지 않은 그해 7월 정부는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을 통해 이 사업을 확대하기로 하고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에 나섰다.
총사업비가 3642억 원으로 예타를 받아야 했지만 같은 달 국무회의를 거쳐 실제로 예타를 면제받았다. 2022년에는 정부 예산에 반영되면서 첫발을 뗐다. 하지만 올해 감사원은 당초 환경부가 산정한 사업 효과의 70∼80%는 인정하기 어렵고 경제성이 크게 부족하다는 국책연구기관의 사업성 검토 결과를 무시한 채로 사업이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최근 8년 동안 이처럼 ‘국가 정책적 사업’이라는 이유로 예타를 면제한 사업 규모가 90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게는 수천억 원, 많게는 수조 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한 사업을 추진할 때 객관적인 효과 분석을 건너뛰는 경우가 늘면서 재정 사업이 부실하게 추진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9년 도입된 예타 제도는 총사업비가 500억 원 이상이면서 국가 재정이 300억 원 이상 지원되는 신규 재정 사업에 대해선 각 사업 부처 대신 기재부가 타당성을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10호 예타 면제’를 통해 이 같은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 지역 균형발전이나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필요한 사업을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할 경우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예타를 면제할 수 있다는 조항을 활용해 정부가 원하는 사업을 예타 없이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10호 예타 면제를 활용해 2018년 9조7000억 원 규모의 청년 일자리 대책(11건)의 예타를 건너뛰었다. 2019년 23조1000억 원 규모의 균형발전 프로젝트(22건), 2020년 4조9000억 원 규모의 디지털·그린 뉴딜 사업(8건)의 예타도 면제한 것으로 분석됐다.
● ‘사업성 부족’, ‘과다 책정’ 지적 잇달아
올해도 양자과학기술 플래그십 프로젝트(7292억 원), 미래 판기술 프로젝트(9743억 원) 등 대규모 연구개발(R&D) 사업의 예타 면제가 이어진 가운데 전공의 수련환경 혁신 지원(1조4677억 원) 등 의료 개혁과 관련한 예타 면제도 진행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정부의 지향점을 반영해 이번 정부는 시급한 R&D 과제를 중심으로 예타 면제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형 ARPH-H 프로젝트의 경우 예타 면제 이후의 사업 적정성 검토에서 기존보다 7686억 원이나 적은 1조1628억 원이 적정 사업비로 계산됐다. 또 10호 예타 면제 문제를 살펴본 감사원은 상당수 예타 면제 사업의 타당성이 부족하고 일부 면제 사업은 이를 심의한 기재부 재정사업평가위원회의 검토 기간이 만 하루에도 못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R&D 사업의 경우 사업성 측정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산 사업은 비용 대비 효과를 살펴보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며 “정부의 자의적인 예타 면제가 계속될 경우 재정 집행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재정 건전성까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0호 예타 면제국가재정법 제38조 제2항 제10호에 따라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면제해 주는 것을 뜻한다. 총 사업비가 500억 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 원 이상인 정부 재정 사업은 예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제10호에서 지역 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한 국가 정책적 추진 사업은 예타를 면제할 수 있도록 했다.
세종=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