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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뭘 파는 가게야”… 서울시내 간판 5개 중 1개가 ‘외국어’

입력 | 2024-10-09 01:40:00

고령층 “간판 보면 잘 몰라 불편”
식당 메뉴판에 영어-일어만 표기도
‘한글 병기 안하면 불법’ 대부분 몰라
그나마 3층이하 건물은 적용 안돼




“여기가 커피집인가요? 겉모습은 금은방 같기도 하고.”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대청역 일대를 걷던 이범수 씨(73)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시선은 프랑스어로 적힌 한 카페 간판에 한참 머물렀다. 어디에도 무슨 가게인지 한글 설명은 없었다. 이 씨는 프랑스어는 물론이고 영어 등 외국어를 잘 모른다. 그는 이 골목에 즐비한 ‘외국어 간판’을 볼 때마다 막막함을 느낀다. 원래 강원 원주시에 살다가 3년 전 서울로 이사 온 그는 “반찬가게를 찾아갈 때도 간판 앞에서 멈칫하기 일쑤”라고 토로했다.

● 외국어 간판 앞에서 고령층 ‘갸웃’

동아일보 취재팀이 6,7일 이틀간 서울과 경기 번화가 일대를 70대 노인들과 동행하는 동안 한글 없이 외국어로만 표기한 간판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한글날을 앞둔 6, 7일 동아일보 취재팀은 외국어 간판이 많은 서울 강남구와 종로구,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일대 거리를 70대 노인들과 동행 취재했다. 7일 오후 이 씨와 함께 대청역 일대를 20여 분간 다니는 동안 마주한 간판 43개 중 10개는 영어 등 외국어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 중 작게나마 한글이 병기된 간판은 6개, 나머지 4개는 한글 표기가 아예 없었다.

같은 날 강남역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근처 상점가에는 K-MECCA, DESIGN SKIN, LLOYD, BRAND MARKET, HOLLYS 등 영어 간판이 가득했다. 근처에서 만난 김영균 씨(74)는 “뭘 파는 가게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시가 조사한 간판 7795개 중 1651개(21.2%)는 외국어로만 적혀 있다. 한글과 외국어를 함께 적은 간판은 1450개(18.6%)뿐이다. 외국어를 자주 접한 젊은 세대는 이용에 별 불편함을 못 느끼지만 고령이나 외국어에 문외한인 이들은 다르다. 특히 노인들은 가게 외관을 한참 살펴도 도대체 뭘 하는 가게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붕어빵 가게 앞에서 강혜순 씨(78) 등 70대 노인들이 영어 간판과 일본어 메뉴판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최근에는 영어뿐만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 간판도 크게 늘었다. 식당 중에는 아예 메뉴판도 외국어로만 표기한 곳도 있다. 수원시 행궁동의 한 붕어빵 가게는 간판과 메뉴판을 일본어와 영어로만 표기했다. 7일 이 가게를 방문한 강혜순 씨(78)는 “온통 외국어라 주문이 힘들었다”고 전했다. 대구 동성로의 한 일식당은 메뉴판에 음식 가격을 아예 일본 엔화로만 표기해 논란이 일었다.

● 법은 유명무실, 지자체는 단속 손 놔

외국어 간판을 규제하는 법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옥외광고물법 제5조, 12조, 같은 법 시행령 제12조 등에 따르면 간판은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한국어 표기’가 원칙이고,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문제는 이 조항을 적용받는 간판은 건물 4층 이상 높이에 설치된 간판들이란 점이다. 1∼3층 높이 설치 간판들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외국어 간판을 많이 쓰는 카페, 음식점, 상점은 대부분 1층에 있다. 게다가 간판 면적이 5m² 이하인 경우에도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데, 이러면 대부분 중소형 상점의 간판은 적용되지 않는다. 규제 범위가 너무 작아 법이 있으나 마나 한 셈이다.

지방자치단체도 단속 의지가 없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그 많은 가게 간판을 일일이 다 단속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외국어 간판을 내건 상인 대부분은 “문제가 되는지 몰랐다”, “관련 법이 있는지 몰랐다”고 밝혔다. 강남역 인근 한 소품점 직원은 “외국인 고객이 많다 보니 영문 간판을 선택했는데 법에 한글을 병기하라는 규정이 있는지는 몰랐다”고 했다.

현재 국회에는 관련 규제 적용 범위를 모든 간판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이삼열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법 적용 대상을 늘리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간판은 거리에 정보를 표현하는 공적 의미도 갖기 때문에 한글을 병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서지원 기자 wish@donga.com
최원영 기자 o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