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전문가 12人 취향 담긴 플레이리스트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어린이들과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2024.10.08. [서울=뉴시스]
대중음악계엔 이런 격언이 있다. 좋은 선율은 1위곡을, 근사한 노랫말은 유행가(流行歌)를 만든다.
특히 순정한 우리말로 빚어낸 노래는 크게 히트하지 않아도 마음에 지문을 찍는다. 쪼개지는 멜로디·리듬에 맞춰 가사도 맥락 없이 미분·적분되는 시대, 9일 한글날에 맵시 있는 작법으로 빚어낸 노랫말의 노래가 더욱 그리워진다.
노래 가사만큼 글을 문학적으로 쓰는 음악 전문가 12인에게 상업성을 노린 영리한 대중음악의 노랫말이 아닌, 저마다 마음을 움직인 각자의 취향이 담긴 좋은 가사의 노래들을 추천 받았다.
◆가곡 평롱(平弄) ‘북두칠성’(성혜인 음악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평롱 ‘북두칠성’의 노랫말에는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났으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해 이 밤이 끝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투영돼있다. 그 중 백미는 “샛별 없이 하소서”다.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새벽 무렵 동쪽 하늘에 뜨는 금성(샛별)을 거둬달라고 표현했다. 하늘과 바람, 해와 별자리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던 옛 사람들의 사랑이 시적으로 느껴진다.
〈가사 전문〉
북두칠성(北斗七星) 하나 둘 서이 너이 다섯 여섯 일곱 분께 / 민망(憫惘)한 발괄(白活) 소지(所志) 한 장(張) 아뢰나이다 / 그리든 임(任)을 만나 정(情)엣 말삼 채 못하여 날이 쉬 새니 글로 민망(憫惘) / 밤중만 / 삼태성(三台星) 차사(差使) 놓아 샛별 없이 하소서
◆김사월 ‘밤에서 아침으로 가는 통신’ & 버둥 ‘00’(EBS ‘스페이스 공감’ 황정원 PD)
‘밤에서 아침으로 가는 통신’ : “빛이 되어 내 마음을 말려줘, 쓸모와 물음 없는 행복을 줘” “어둠 되어 내 마음을 적셔줘, 외로움을 지키는 인내를 줘” 가장 나약해진 순간에 시작되는 밤과 낮의 대화를 상상하게 한다. 쓸쓸하지만 다정함을 품은 문장들이다.
◆김창완 1집 ‘기타가 있는 수필’ 중 ‘계절이 끝날 무렵’(박준우 음악평론가(블럭(Bluc))(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
‘기타가 있는 수필’이라는 앨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앨범에 담긴 모든 가사가 하나의 문학 작품이며 앨범이 곧 한 권의 책 같기도 하다. 산울림의 아름다운 한글 제목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김창완이라는 음악가가 한글로 풀어내는 아름다움도 많은 분들이 꼭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블유(W) ‘만화가의 사려깊은 고양이’(이대화 대중음악 저널리스트(한대음 선정위원))
고양이는 반려자가 만화가인 줄도 모른다. 그저 이 맘때쯤 말이 없어지고 가득 웅크린 채 잠드는 것을 알 뿐이다. 영문을 모르는 고양이와 창작의 고통을 겪는 만화가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따뜻한 이야기.
김창기가 만든 노래는 일상의 언어로 만들어진 노래들의 전범이 돼왔다. 그는 늘 평범한 언어를 가지고 비범한 노래를 만들어왔고, 행간 안에 말로 못할 숱한 감정을 담았다. 그 위대한 시작을 알린 노래다.
◆루시드폴 ‘고등어’ & 에픽하이 ‘스포일러’(임희윤 대중음악 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고등어’ : 고등어에 눈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다. 고등어의 눈을 본 적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고등어의 눈을 이렇게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그 눈 속에 담긴 서사를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로까지 만든 사람은 그 전에 없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튼튼한 지느러미로/나를 원하는 곳으로 헤엄치네’의 애이불비의 1인칭 도입부부터 특별하다. 어려운 단어나 난해한 비유 하나 없이도, 단순한 한국어만으로도 잘 쓰인 하이쿠를 방불케 하는 심오한 삶과 죽음의 서사시를 완성해 냈다. 명(名) 가곡 ‘명태’(양명문 시, 변훈 작곡)에 대한 21세기식의 명답.
‘스포일러’ : 식어가며 페이드 아웃 하는 사랑, 이별 직전의 슬픈 예감을 영화 스포일러에 절묘하게 빗대 표현한 곡. 복선, 클리셰, 반전, 배역, 대사, 자막, 결말, 영사기, 필름, 해피엔딩, 페이드 아웃, 프레임, 신(scene) 같은 영화 촬영이나 비평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가 직유나 은유를 품고 운율 구조 속에 늘어서면서 이별 과정에 누구나 겪을 만한 감정의 연쇄나 소용돌이를 잘 표현해냄. 외래어나 외국어 표현도 끼어들지만 대개는 아름답고 정제된 한국어 표현들이 가장 돋보임. ‘망할 촉’을 ‘망할 추억’처럼 발음해 중의적 해석을 자극하는 부분, ‘걸맞은 벌인 걸까?’에서 ‘걸맞는’으로 오용하기 쉬운 부분을 ‘걸맞은’으로 정확하게 구사하는 부분도 눈에 띄는 한국어 사랑 디테일 아닐까 함.
◆루시드 폴 앨범 ‘오 사랑’ 모든 수록곡(신민경 LG아트센터 프로듀서)
가끔, 외국에서 지칠 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 사랑’ 앨범을 재생한다. 루시드 폴이 쓴 서정적인 우리말 가사와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음성은 낯섦과 불안으로 종종 치던 나를, “불 켜진 동네거리를 지나 시나브로 밝아오는 자정의 골목”(‘그건 사랑이었지’ 중에서),으로 일순간 데려가 따뜻하게 안아준다.
◆생각의여름 ‘소리들’(‘스페이스 공감’ 김효정 작가)
종종 제 모습이 부끄러울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는 닮고 싶은 사람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 ‘우리들 모두 서성거리는 모음이라서 / 골목의 ㄱ, 능선의 ㅅ / 냇물의 ㄹ을 머금으려 애쓰는 마음이라서’. 공감에서 일하는 것이 좋은 이유도 비슷합니다. ‘햇볕의 ㅎ을 빌려 지펴지도록’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들 곁을 서성이고 있어요.
◆어떤날 ‘초생달’ & 가리온 ‘옛 이야기’(유지성 프리랜서 에디터(전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초생달’ : 유독 서울과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던 20대 초,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기타학원을 다녀오는 길은 항상 늦은 밤이었는데, “뜻 모를 너의 얘기와 버려진 하얀 달빛과 하얗게 타버린 또 하루를 난 위로하면서 술 취한 내 두 다리가 서성거리는 까만 밤”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를 흥얼거리며 매번 지상구간 지하철을 타고 똑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리를 건널 때는 달이 참 잘 보였고, ‘출발’에 이어 ‘초생달’로 이어지는 음반의 시작 구간은 그 적절한 맥락만큼이나 서울의 귀갓길, 그리고 이 도시를 아마도 처음으로 꽤 낭만적으로 보이게 했다.
‘옛 이야기’ : 구체적인 가사를 좋아한다. 구체적일수록 순간에 가까울 것이고, 그 순간은 거기에 진짜 있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희열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홍대에서 신촌까지 깔아놓은 힙합 리듬”, “주말이면 체스판 바닥에 비트를 실어 한 판”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창작자 그리고 목격자의 역사이자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순간의 기록일 것이다. 한국어 가사로 쓰인 랩에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굴뚝’을 샘플링한 비트까지 한글날을 맞아 권하기에 무척 잘 어울린다.
◆윤하 ‘사건의 지평선’ & 이소라 ‘바람이 분다’(조혜림 프리즘(PRIZM) 음악콘텐츠 기획자(한대음 선정위원))
‘사건의 지평선’ :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소설 속 화자가 이야기를 건네는 듯 문학적인 분위기가 귀와 눈을 사로잡는다.
‘바람이 분다’ :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별의 아픔과 잔인한 슬픔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빗겨나는 듯한 쓸쓸한 기분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정밀아 ‘별’(정병욱 대중음악 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정밀아의 가사는 생활 밀착형 가사, 시적인 가사 모두 표현이 예쁘고 그 뜻에도 힘이 있다. 이 노래의 “이 세상을 떠나면 바슬바슬 거리는 은하수 빛이 되어 하늘을 날 거야”는 크고 아름다운 시각적 심상, 작고 소중한 촉각의 심상이 맞물려 기억에 남는 공감각을 완성한다.
◆조용필 ‘바람의 노래’(황선업 대중음악평론가(한대음 선정위원))
세상의 진리를 이보다 더 알기 쉬운 언어로 꿰뚫는 노래가 있을까 싶다. 삶을 관조하는 가사는,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에 더 깊게 스며든다. 특히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라는 담담한 선언이, 나는 오늘도 삶에 있어 사랑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재차 깨닫게 한다.
[서울=뉴시스]